식물도 동물이 하는 짓은 다 한다 -52

<상사화는 봄에 난 잎이 사라지고 나서야 꽃이 피어 꽃과 잎은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이른 봄에는 잎조차도 아름답다. 그런 식물 중 하나가 상사화다. 3월초만 되어도 따뜻한 양지에 뾰족하게 잎을 내미는 상사화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루가 다르게 자라지만 꽃은 피지 않는다. 6월로 접어들면 벌써 잎은 누렇게 변한 뒤에는 화단에서 사라진다. 7월 하순 경에 삭아 없어져 버린 자리에서 꽃대가 올라온다. 나팔 같은 연분홍 꽃이 무리지어 핀다. 잎은 잎대로 아름답고 꽃은 꽃대로 아름답다. 꽃과 잎이 서로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상사화(相思花)란 이름을 얻었다. 이른 봄 다른 식물에 앞서 지상으로 나와서 알뿌리에 잎과 꽃봉오리까지 만들고는 한 생을 마친다.

또 다른 상사화가 있다. 추석 무렵 고창 선운사 주변 산을 아름답게 수놓는 꽃무릇(석산이라고도 함)이 그것이다. 선운사는 봄 동백과 가을 꽃무릇만 보아도 본전은 뽑는다. 산을 온통 태우는 붉은 꽃이 피고지면 잎이 나온다. 이 역시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잎은 하늘을 가로막는 나무가 낙엽이 되어 방해가 없는 가을-겨울-봄 동안에 광합성을 한다. 잎은 3월에 접어들면 사라진다. 광합성을 방해하는 나뭇잎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계절이 온 때문이다. 상사화의 땅속뿌리(실은 비늘잎이다)는 봄-동화작용, 여름-개화, 꽃무릇의 땅속뿌리는 가을-동화작용, 가을-개화를 정확히 알고 있다. 이렇듯 뿌리는 깜깜한 흙 속에 있어도 세월이 가는 것을 훤히 알고 있다.

식물생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덴마크의 라운티에르(Christen Raunkiær)는 둥굴레 뿌리(실은 땅속줄기다)로 가을에 이런 실험을 했다.
뿌리를 정상 깊이 심었더니 정상 깊이로 줄기를 뻗어 겨울눈을 틔울 준비했다. 얕게 심은 것은 줄기를 땅속으로 뻗어 내려갔고, 정상보다 깊이 심은 것은 새 줄기가 비스듬히 커 올라 정상 깊이로 왔다. 얕게 심고 화분으로 덮어놓아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은 오히려 줄기가 땅 표면까지 돋아 올라왔다. 땅속줄기가 깊이 있다고 착각한 때문이다. 겉으로 올라온 줄기는 겨울 동안 다 얼어 죽어 버렸다. 뿌리는 흙 속에서 지온과 햇빛의 양과 비추는 시간 등을 모두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때에 알맞게 꽃과 잎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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