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 충남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장

"농민권리선언에는 
식량권, 종자권, 토지권, 가격결정권 등 
전통적인 인권의 영역을 넘어선
권리들이 포함돼 있다. 
유엔은 이런 문제의 해결 없이는
농민의 문제와 인류의 지속가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박경철 충남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장

다음달 17일이면 유엔 농민권리선언 이 유엔 총회에서 선포된 지 3년이 된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10여 년 동안 전 세계 농민조직, 특히 농민의 권리가 침해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개도국 소농조직의 목소리를 경청해 만든 농민권리선언을 유엔총회에서 회원국의 투표를 통해 통과시킨 역사적인 날이다. 

농민권리선언의 통과 과정은 쉽지 않았다. 선진국들의 노골적인 방해가 있었다. 특히 미국의 방해가 컸다. 미국은 농민권리선언 가운데 종자권을 가지고 이 선언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농민권리선언에서는 농민의 종자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종자권은 미국과 서구의 다국적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종자는 오랫동안 농민의 손에 의해 전수되고 그 지역의 풍토에 맞게 전수돼 왔는데, 어느 순간 농민의 손에서 빼앗겼다. 농민은 농사를 짓지만 종자를 생산해서 판매를 할 수 없다. 기업만이 종자를 생산·유통할 수 있다. 농민이 토종종자를 생산해도 전문으로 판매를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종자권을 농민에게도 갖게 하자고 하니 그들이 찬성할 리가 없다.

사실 유엔에서 처음부터 농민의 권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비아 캄페시나(세계농민 단체연대조직) 등 개도국 농민단체들의 절절한 호소를 유엔이 받아들인 것이다. 유엔은 2000년을 맞이해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발표하며 2015년까지 전세계 빈곤인구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전세계 빈곤인구는 대부분 개도국에 있고 그들 대부분은 농민이기 때문에 농민문제 해결 없이는 유엔의 목표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농민권리선언에 식량권, 종자권, 토지권, 가격결정권 등 전통적인 인권의 영역을 넘어서는 권리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유엔에서는 이러한 문제 해결 없이는 농민의 빈곤과 인류의 지속가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이들 권리를 포함해 최종적으로 농민권리선언을 선포한 것이다. 당시 우리 정부는 종자권에 대한 권리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유엔총회의 농민권리선언 표결에서 기권표를 던졌다. 

WTO, FTA보다도 더 상위기구에서 선포된 유엔 농민권리선언에 대해 농업계 내에서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행히 올해 농어업·농어촌특별대책위원회에서 유엔 농민권리선언을 국내에 알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포럼을 구성했지만 아직 활동이 미흡하고 농식품부 등 정부에서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세계는 1차,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을 치룬 후에야 이러한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세계인권선언을 만들었다. 인류의 존엄과 평등, 정의와 평화에 관한 기본적 권리를 규정하기 위해서다. 이 선언이 강제는 아니지만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의 헌법과 법률의 기본 토대가 됐고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됐다. 마찬가지로 유엔 농민권리선언은 선진국 주도의 자유무역과 다국적기업의 지배체제 하에서 황폐화된 농업과 농민의 권리를 복원해 인류의 존엄과 지속가능한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유엔 농민권리선언이 선포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농촌현장은 변화된 게 거의 없는 것 같다. 아니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해에도 별다른 대책이 없고, 초등돌봄교실 과일간식 등 먹거리 3대 예산은 전액 삭감되고, 농촌에는 폐기물이 몰려들고 있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 태양광이 농지를 잠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토종종자를 지키는 여성농민들의 활동은 눈물겹다. 농민의 권리에는 ‘기권’한 정부가 과연 누구의 권리는 그렇게 지키려고 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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