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심훈家 종손 심천보 선생

1935년 농촌계몽을 주제로 한 소설 ‘상록수’와 애국시(詩) ‘그날이 오면’을 쓴 심훈의 종손인 심천보 선생을 만났다.
소설 ‘상록수’의 실존인물인 심재영 선생의 맏아들인 심천보 선생은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1966년 미국의 피츠버그대학 대학원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건축 외장재 전문회사인 ‘센츄리아’에 입사해 2011년 퇴직했다. 2011년 40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당진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가 지은 고택에 기거하며 생전에 심훈 선생이 ‘상록수’, ‘영원한 미소’, ‘직녀성’ 등의 소설과 시를 쓴 필경사와 심훈기념관을 돌보는 심훈기념사업에 힘쓰고 있다. 그로부터 심훈의 애국․농촌사랑정신이 담긴 문학활동 업적과 그가 최근 출간한 역사비평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심훈 선생은 35년 짧은 생애에
시인․소설가․영화인․언론인으로서
애농애국의 혼을 널리 고취시켜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70년은
반만년 역사에서 ‘한강의 기적’
이뤄낸 가장 자랑스러운 시기

애농애국 교본이었던 소설 ‘상록수’
“저에겐 종조부가 되시는 심훈 선생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36년 35년의 짧은 생애를 마칠 때까지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심훈 선생께선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소설 공모에서 ‘상록수’란 제목의 소설로 당선했어요.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한 제 아버지가 귀향해 90명의 농민을 모아 농업기술 지도와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교육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해 쓴 소설이죠.

소설엔 재미를 더하려고 18세 처녀로 경기도 안산에서 기독교 전파와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실제 인물인 최용신을 소설 속으로 가져와 둘(박동혁·채영신)의 사랑과 농민계몽 이야기를 러브스토리화해 당선된 거죠. 당시는 농업중심의 사회였기에 ‘상록수’가 국민적 공감을 얻어 사랑받았어요. 소설 ‘상록수’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지나면서 중고학생들의 필독서로 많이 읽히며 경제발전 과정에서 정신문화를 일으킨 소설로서 애농애국의 교본이 되기도 했지요.

심훈 선생께선 경기중학 전신인 경성고보 4학년 재학 중인 18세 때 3.1운동에 참가해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 8개월간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이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엔 18세 소년으로는 상상키 어려운,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혼이 듬뿍 담긴 글을 썼어요. 그리고 ‘그날이 오면’이란 시를 썼지요.”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그날이 오면’ 시 일부)

독립을 갈망하는 국가들의 시인이 쓴 많은 시 중에서도 ‘그날이 오면’은 가장 깊은 애국혼이 담긴 표현으로 널리 평가받고 있어요. 선생께선 이 밖에도 100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35년 짧은 생애에 독립운동가, 민족저항시인, 소설가, 영화인, 언론인으로서 많은 활동과 업적을 남기셨죠.”

민주주의 시대 연 건국대통령 이승만
심천보 선생이 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1966년 미국에 공부하러 갈 당시만 해도 제 고향인 당진 송악읍 부곡리에서 서울을 가려면 집에서 15㎞ 떨어진 당진읍에서 버스를 타고 신례원을 거쳐 150㎞나 가야 했습니다. 배편으로는 한진포구에서 인천행 똑딱선을 6시간 타고 내려서 인천~서울행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먼 길이었어요.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돼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게 됐죠.

반만년 역사상 지난 70년간 이처럼 찬란한 번영을 이뤄낸 공로자들의 업적을 되새겨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발전을 무너뜨리지 않고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줘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책을 쓰게 된 것이죠.
이 같은 기적의 문을 연 사람은 고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이 대통령은 왕조시대가 무너지고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민주주의의 신시대가 되는 시점에서 소련의 개입으로 한반도가 분단돼 38선 이북에 인민공화국이 설립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통일한국을 이루려고 했지만 역부족으로 38선 이남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세우게 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찍이 미국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혜택과 이점을 체득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가 해방되자 지체 없이 자유민주국가로서의 헌법 제정과 국회 개원 등 민주정치를 시작했습니다. 농지개혁과 교육제도 확립, 공고한 한미동맹 조성, 그리고 일찍부터 원자력의 유용성을 간파해 원자력 연구 기반과 관련 인력 양성에 힘썼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외교력을 발휘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한강의 기적’ 일군 박정희 대통령
“고 박정희 대통령은 오늘날 한국이 세계 10대 강국과 국민소득 3만 불의 기반을 이룩한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농공병진정책을 추진해 오랜 식량난을 해결하고 제철, 조선, 전자 등 중공업을 일으켜냈습니다.
18년 장기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을 당시, 병원에서 시신을 수습했던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시계는 허름한 세이코이고 넥타이핀은 도금이 벗겨지고 혁대는 헤어져 있어 꿈에도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우리는 지금도 박정희 대통령 덕에 고속도로를 달리고 지하철을 타고 삽니다.”
끝으로 심천보 선생은 이런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우린 가난한 나라에서 이젠 세계 10대 강국에 올라섰고 폐허에서 번영을 이뤄냈습니다. 국가 멸망의 위기였던 6.25전쟁에서도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복지정책 남발로 국가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70년에 빛나는 번영의 역사가 쇠퇴할까 우려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씀을 받들어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 번영의 역사를 계속 이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쓴 책이 국민 모두에게 국가 번영과 애국혼을 되살리는 동력이 됐으면 합니다. 책 판매로 얻는 인세는 두 분 대통령의 기념관을 짓는데 보탤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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