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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다루는 솜씨 탁월했던 문인 작사가 조명암

기사승인 2020.10.30  17: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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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26> 시인 작사가 조명암과 <선창>

   
▲ 월북 전인 1946년경 아내 장연옥씨, 딸 조혜령씨(위 사진)와 찍은 사진

본명이 조영출(趙靈出)인 조명암(趙鳴岩, 1913~1993)은 고향인 충남 아산의 영인에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독립운동가라는 아버지는 피신해 집을 나가 있었고, 어머니는 비구니 승려가 돼 절(금강산 석왕사)에 들어갔다.

결국 조명암도 15세 때인 1924년 중이 될 요량으로 금강산 건봉사로 출가했다.(우선 절에서는 먹고 자는 게 간단히 해결됐으므로)
그때 중련(重連)이란 법명을 받고 절에서 부설한 봉명학교에서 수학했다. 이때 이곳에서 만해 한용운 선사를 만나 그의 주선으로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고, 고교 졸업 후 일본의 와세다대 불문과에 입학해 1941년에 졸업한 것을 보면, 머리는 상당히 우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700여곡 노랫말 남긴 ‘스타 작사가’
그는 국내 유수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정식 등단한 문인 임에도 불구하고, 시보다는 오히려 대중가요 가사를 더 많이 써서 각광을 받았다.
특히 당대 ‘히트곡 메이커’로 불리던 (가수)남인수+(작곡가)박시춘과 명콤비를 이뤄 한달음에 ‘스타 작사가’가 됐다.

   
▲ 조명암이 소년시절 출가했던 강원도 고성군 금강산 건봉사 경내에 있는 조명암 시와 노래비.(앞면에 시 <칡넝쿨>, 뒷면에 조명암 얼굴 부조상과 <고향초>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그것이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했지만, 오케레코드사에 픽업돼 전속작사가로 있으면서 그는 당시 대중가요계에서 <봄날은 간다>의 작사가 손로원과 함께 필명(筆名)을 가장 많이 가졌던 작사가로도 유명하다. 광복 직전까지 무려 700여 곡의 노랫말을 지으면서 이가실, 금운탄, 김가인, 김호, 남려성, 부평초, 산호암, 양훈, 함경진 등의 필명을 썼다.

그가 처음 작사가로 이름을 올린 노래는, 1934년 신춘문예 유행가 입선작이었던 <서울노래>다. 그후의 작품들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알 만한 히트곡 천지다.
▲1935년= 추억의 소야곡, 청춘부두 ▲1938년= 알뜰한 당신, 한양은 천리원정, 꼬집힌 풋사랑, 앵화폭풍, 청노새 탄식, 총각진정서, 바다의 교향시, 꼴망태 목동 ▲1939년= 다방의 푸른 꿈, 코스모스 탄식, 항구의 무명초, 어머님전 상백, 세상은 요지경 ▲1940년= 울며 헤진 부산항, 화류춘몽, 눈오는 네온가, 꿈꾸는 백마강 ▲1941년= 진달래시첩, 아주까리 등불, 가거라 초립동, 무정천리, 진주라 천리길, 선창 ▲1942년= 낙화삼천, 낙화유수, 목단강편지, 목포는 항구다, 고향설 ▲1943년= 어머님 안심하소서, 알성 급제, 황포돛대, 서귀포 칠십리 ▲1945년 이후= 울어라 은방울, 아내의 노래 ▲1948년= 고향초 등이다.

<선창> 자신의 대표곡으로 꼽아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정부가 수립되고, 남북분단이 가시적으로 굳어지자 그는 좌익성향을 뚜렷이 보이며 각종 좌익단체활동을 하다 좌익계열 문인들과 함께 월북했다.
그후 6.25 때에는 북한 인민군 종군작가로도 활동했고,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 창작책임자를 지내기도 했다. 북한 문화성 부상의 자리에까지 올라 계관시인 칭호까지 받는 등 북한 문인으로서는 최고대우를 받고 지내다가 1993년 5월 평양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 북한에서의 조명암 만년모습

그의 월북과 함께 우리 정부는 1965년 조명암의 노랫말로 된 대중가요는 모두 ‘공식적 금지곡’으로 지정했고, 27년만인 1992년 해금돼 음반발매가 가능해졌으며, 1994년 모든 제재가 풀렸다.
‘탁월하게 우리 말 다루는 솜씨’로 압축되는 그의 노랫말들은 박시춘·손목인·전수린 등 당대 최고 작곡가들의 곡이 입혀지고, 이난영·남인수·이화자·황금심·장세정·송민도·고운봉 등 역시 당대 최고의 스타가수들이 노래를 불러 추종불허의 스타작사가로 군림했다.

그는 수많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서도 고운봉이 노래한 <선창(船艙)>을 자신의 대표곡으로 꼽았다. 특히 조명암의 고향인 충남 아산군 영인면과 고운봉의 고향인 충남 예산이 가까워 서로 이따금씩 오가며 살갑게 지내던 사이로 알려져 있다.

 

              <선창(船艙)>

1. 울려고 내가 왔든가 웃을려고 왔든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이슬 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든 그날도
   지금은 어데로 갔나 찬비만 나린다

2. 울려고 내가 왔든가 웃을려고 왔든가
   울어본다고 다시 오랴 사나이의 첫순정
   그대와 둘이서 희망에 울든 항구를
   웃으며 돌아가련다 물새야 울어라

3. 울려고 내가 왔든가 웃을려고 왔든가
   추억이나마 건질손가 선창아래 푸른 물
   그대와 둘이서 이별에 울든 그날도
   지금은 어데로 갔나 파도만 스친다

                             (1941,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고운봉 노래)

 

고운봉을 스타가수로 만든 <선창>
김진규·엄앵란·도금봉 주연의 영화 <울려고 내가 왔던가>의 주제곡으로 삽입되기도 했던 <선창>은 비 오는 부둣가에서 옛사랑의 추억을 허망하게 더듬는 사내의 이야기를 그린 노래다.
1941년 ‘시정(詩情)의 가아(歌兒)-고운봉 군’이란 광고를 내걸었던 고운봉(高雲峰, 1920~2001)의 본격 가수데뷔곡 이다.

충남 예산출신으로 본명이 고명득(高明得)인 고운봉은 예산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오로지 ‘유행가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아버지의 돈궤에서 30원을 몰래 훔쳐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그리고 이난영·채규엽·강석연 등 당시의 톱가수들이 전속돼 있던 태평레코드사를 직접 찾아가 작곡가 이재호, 문예부장이자 작사가인 박영호를 만나 테스트를 받고 합격하면서 태평연주단·조선악극단 단원으로 본격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깔끔하면서도 구성지고, 맑고 깊은 호소력 있는 점잖은 창법’이란 평을 받는 그의 국내 첫 데뷔곡은 이재호 곡인 <남강의 추억>. 그러나 그 전인 1939년 일본에 건너가 10여년간 활동하며 <국경의 부두>란 곡으로 정식 데뷔했었다.

아무튼 ‘순정가수 고운봉’이란 슬로건을 내건 그의 데뷔는 성공적이었고, 그 이듬해인 1941년 8월 <선창>을 내놓으며 인기는 절정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후 <백마야 가자>, <홍등 야곡>, <명동블루스> 등 81세에 뇌경색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모두 200여 곡의 노래를 남겼다.
그의 혼이 실린 대표곡 <선창>의 노래비는 그가 세상뜨기 1년 전인 2000년에 그가 직접 참석해 눈물로 부르는 <선창>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그의 고향인 충남 예산의 덕산온천 구내에 세워졌다.

 

■ 스크랩 scrap!!!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우리 대중가요계에는 문인(文人)출신 작사가들이 많았다. 그래서 누군가는 대중가요 가사를 ‘가요시’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조명암이고, 그와 쌍벽을 이루던 작사가가 당시 극작가로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을 맡고 있으면서 <번지 없는 주막>(백년설),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짝사랑>(고복수)의 노랫말을 지은 박영호(朴英鎬, 1911~1952)다.
이들을 가까이에서 본 작사가 고 반야월은 “조명암의 작품은 가늘고 여성적인 경향을 띠었고, 박영호는 선이 굵었다”고 생전에 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두 사람이 비견될 수 없는 것의 하나가, 조명암은 정통 중앙일간지인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詩)가 당선돼 조선문단에 당당히 ‘시인’으로서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조명암은 21세 되던 해인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신시(新詩) ‘동방(東方)의 태양(太陽)을 쏘라’가 당선되고, 또다른 유행시가(流行詩歌) 부문에서는 ‘서울 노래’란 작품이 당선작 없는 가작에 동시 입선돼 조선문단의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당선시> ‘동방의 태양을 쏘라’

‘동방(東方)이 얼어붙엇다 / 태양(太陽)의 붉은피가 얼어붙엇다 // 젊은이여ㅡ이 고장 백성(百姓)의 아들이어! / 손에 든 화살을 힘주어 쏘아 보내라 / 태양(太陽)의 가슴의 붉은피를 쏘아 흘이라 / 백성(百姓)이 광명(光明)에 굼줄이고 / 강산(江山)의 줄기줄기 숨죽어 누으니 // 허믈어진 옛터 / 님의 꽃닢 하나 둘 ㅡ// 아 젊은이 들아 /함정(陷穽)에 빠진 사자(獅子)의 포효(咆哮)만이 / 광명(光明) 잃은 보표(譜表) 우에 달음질칠 이날은 아니다 // 화살을 쏘라 / 동방(東方)의 태양(太陽)을 뽑아내라 / 피끓는 심장(心臟)에 불을 붙여 / 낡은 봉화(烽火)ㅅ재 우에 높이 들고서서 / 산(山)과 들 곳곳에 이날의 레포를 알외우자’


(※원문에 한자로 표기돼 있는 것을 괄호안에 넣었고, 맞춤법 표기는 원문 그대로 임-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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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희 기자 history8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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