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20> 고향 그리는 노래(3)-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고향설>

 

▲ 최전성기 때의 백년설

(1)  <나그네 설움>

1.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2. 타관땅 밟아서 돈지 십년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에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3.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할 지평선에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가랴 흘러갈소냐

                    (1940, 고려성(조경환) 작사 / 이재호 작곡)

 

▲ <나그네 설움> 노래비. 백년설의 고향인 경북 성주의 모교(성주고교 전신 성주농업보습고교) 교정에 새로 세웠으나, 친일 전력이 문제돼 얼굴 동상이 훼손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에 버리고 고향을 떠나왔다. 그러나, 그 사랑하는 사람 곁, 정과 꿈을 두고 온 그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멀고 먼 객처에서 다만 무기력하게 ‘흐르고 또 흐를 뿐’이다.
그래서 서럽고, 그래서 남모를 눈물만 흘린다… 이 ‘나그네’는 ‘너’일수도, ‘나’일수도 있으며, 특히 일제시대의 고통스러운 어두운 현실 앞에서는 이 ‘실향’과 ‘방랑’은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었던 커다란 아픔이었다.

<나그네 설움>으로 최고 인기스타가 된 문학지망생
1939년 가을, 일제의 서슬퍼런 압제하에서 사상범으로 지목돼 당시의 경기도경찰국 외사과(광화문 정부청사 맞은편 옛 치안본부 자리)에 불려가 장시간의 혹독한 취조를 받은 백년설(白年雪, 1914~1980)이 풀려난 시각은, 전차가 끊어진 심야였다. 이때 먼저 끌려와 취조를 받고 풀려나 밖에서 백년설을 기다리고 있던 작사가 조경환(1910~1956)과 만나 광화문 근처의 한 허름한 술집에 들어가 대포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게 됐다.

이때, 백년설이 아무말없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그 위에 펜으로 뭔가를 적어내려갔다.(경북 성주가 고향인 백년설은 가수가 되기 전 본래 문학지망생으로 일본 유학도 했었다.)
…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

▲ <나그네 설움> 작사가 조경환 흉상(경북 김천 소재)

이것을 본 조경환이 “이 참에 노래나 한 곡 만들자”며 즉석에서 노래가사를 거침없이 써내려 갔다. <나그네 설움>은 이렇게 야심한 밤 광화문의 한 목로주점에서 탄생했다.

그후, 당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이었던 조경환은 ‘가사에 문제가 있다’며 불온사상범으로 몰려 숱한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4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현재 경북 김천에 조경환-조광환(작곡가 나화랑) 형제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아무튼 백년설의 구성진 창법에 몸을 실은 <나그네 설움>은, 시중에 나오자마자 폭발적 인기몰이를 하며 순식간에 앨범 1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그후 백년설은 고아원 경영, 서라벌레코드사 창업(1953), 가수협회 초대회장(1960)을 지낸 후 1963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종교활동을 하다 돌연 1979년 전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 이듬해인 1980년 9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등의 소위 ‘3대 히트곡’ 외에 500여 곡의 노래를 세상에 남겼다.
<아내의 노래>, <한강>을 부른 가수 심연옥(1928~ , 미국 LA거주)이 그의 부인이다.

 

▲ 대표곡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앨범 재킷

(2) <고향설(故鄕雪)>

1. 한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 이요
   두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 일세
   깁흔 밤 날러오는 눈송이 속에
   고향을 불러보는 고향을 불러보는 젊은 푸념아

2. 소매에 떠러지는 눈도 고향눈
   타관은 낫 설어도 눈은 낫 익어
   고향을 외여보는 고향을 외여보는 젊은 한숨아

3. 이놈을 붙잡어도 고향 냄세요
   저놈을 붙잡어도 고향 냄셀세
   나리고 녹아가는 모란눈 속에
   고향을 적셔보는 고향을 적셔보는 젊은 가슴아

                           (1942, 조명암 작사 / 이봉룡 작곡)

백년설이 소속사를 태평레코드사에서 오케레코드사로 옮긴 뒤, 이난영 오빠인 이봉룡의 곡을 받아 세상에 내놓은 첫 노래다. 당시 백년설은 조선반도 톱스타답게 이적당시 축하금과 계약금을 합쳐 지금의 현금가치로 환산했을 때 최소 1억5천만 원을 받았고, 월급은 1천만 원 이상을 받았다. 당시 오케레코드사에는 박시춘, 김해송 같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 포진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봉룡이 작곡한 백년설의 <고향설>이 단연 인기였다.

심지어는 일본, 중국에까지 이 노래가 널리 유행해 복받쳐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 노래를 부르다 자살하는 실향민들도 나올 정도였다.
이 <고향설>은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원로예술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선정한 <한국 대중가요 고전 33선>에서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 가요 픽 Pick!

두 얼굴의 인생…가수들의 ‘예명(藝名)’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태어날 때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 활동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뿌리인 성까지도 바꾸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다. 이를 이름해서 ‘예명(藝名)’이라고 한다. 이름을 바꾸는 이유는 낯선 팬들이 자신을 조금 더 부르기 쉽고, 보다 아름다운 이미지로 오래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애리수- <황성옛터>를 부른 이애리수가 예명을 가졌던 최초의 가수다. 본명은 이음전(李音全). 당시 극단 취성좌의 대표 김소랑이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카츄샤’란 이름의 악극으로 서울 단성사 무대에 올리면서 그 작품에 나오는 ‘앨리스(Alice)’라는 인물의 이름을 차용해 ‘애리수’로 작명했다.

*백설희- 본명은 김희숙. 케이 피 케이 악극단 시절, 단장인 김해송(<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남편)이, “에베레스트 산의 눈이 밤이나 낮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녹지 않고 빛나듯이 그렇게 빛나라”며 ‘백설희(白雪姬)’라고 지어줬다.

*이난영- 가수 데뷔 전 본명은 이옥례. 태양악극단 시절 박승희 단장이 ‘난초처럼 청초한 그림자’란 뜻의 ‘난영(蘭影)’이라 작명해 줬다.

*남인수- 어렸을 적 본명은 최창수. 그후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그집 성을 따라 ‘강문수’로 개명했다가, 오케레코드사 전속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할 무렵 ‘남인수’라는 예명으로 바꿨다.

*황금심- 본명은 황금동(黃金童). 처음 ‘황금자(黃琴子)’란 이름으로 데뷔했다가, <외로운 가로등>의 작사가 이부풍이 빅터레코드사로 픽업해 ‘황금심(黃琴心)’으로 개명시킨 뒤 <알뜰한 당신>을 취입시켰다.

*신세영- <전선야곡>을 부른 신세영의 본명은 정정수. 가수로 데뷔하며 당시 톱가수들이었던 신카나리아의 ‘신’, 장세정의 ‘세’, 이난영의 ‘영’자를 한 자씩 취해 본인이 직접 작명했다.

*백난아- <찔레꽃>을 부른 가수 백난아는 본명이 오귀숙이다. 태평레코드사 전속 당시 <나그네 설움>을 부른 톱가수 백년설이 ‘난초처럼 청아한 아이’란 뜻의 ‘난아(蘭兒)’로 이름을 지어주고, 성도 자신과 같은 백씨로 바꿔주면서 자신의 양녀로 삼았다.

*도미- <청포도 사랑>을 부른 가수 도미는, 준수한 외모를 뜻하는 ‘도시(都市)의 미남자(美男子)’에서 한자 한 글자씩을 따와 ‘도미(都美)’로 작명했다. 본명은 오종수.

*백년설- 본명은 이갑룡(李甲龍). 뒤에 ‘이창민’으로 개명했다가 가수로 데뷔하면서 ‘일제 치하에서 백의민족의 기상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스스로 ‘백년설(白年雪)’이라 작명했다.

*손로원- <봄날은 간다>, <비내리는 호남선>등의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손로원은 손회몽, 불방각, 손불경, 손영감 등 10여 개의 다양한 필명을 사용했다. 이는 한 조직에 소속해 있으면서 또다른 부업을 해야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최희준- 본명은 최성준. 작곡가 손석우가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며 가운데 이름자를 ‘기쁠 희(喜)’자로 바꿔줬다. 최희준은 아예 법적으로 개명까지 했다.

*안다성-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 칠때>의 가수 안다성의 본명은 안영길. 본인이 세계적인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의 깊고 맑은 영혼의 노래를 사모해 ‘앤더슨’과 가장 가까운 발음이 나는 우리말을 빌어다 쓴 것이 ‘안다성’이다.

*패티 김- 본명은 김혜자. 1950년대 미국의 팝스타 패티 페이지를 흠모해 미8군 무대에서 사용하던 ‘린다 김’이란 이름을 버리고 ‘패티 김’으로 예명을 바꿨다.

*나훈아- 본명 최홍기. 가수로 데뷔하며 가장 부르기 쉽고 편한 성과 이름이라고 생각해 본인이 예명을 직접 지었다.

*남진- 본명은 김남진. 영화감독 문여송이 남진이 가수로 데뷔하기 전에 ‘남쪽의 보배’란 뜻으로 ‘남진’이라 지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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