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14> <고향초>와 송민도의 노래들

전통트로트 흐름 바꾼 <고향초>와 <나 하나의 사랑>

▲ <고향초>노래비. 작사가 조명암 시비 뒷면에 1절 가사가 새겨져 있다.(조명암이 유소년시절 의탁해 있던 강원도 고성군 금강산 건봉사 경내에 있다.)
▲ 2016년 KBS <가요무대> 1000회 특집에 초대돼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송민도.(배경 사진은 데뷔시절 모습)

1945년 8.15 해방이 되자, 우리 사회분위기 전반의 빠른 변화와 함께 서양, 특히 미국의 대중음악(재즈, 블루스, 맘보, 차차차, 왈츠 등과 컨트리 풍의 팝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와 자리잡기 시작하고, 우리의 트로트 양식도 크게 흔들리면서 서서히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조용하게 나타나 예기치 않은 파문을 일으킨 가수가 바로 송민도(宋旻道, 1925~미국 거주)였다.

그리고 과거의 틀에 박힌 트로트의 주된 흐름-기성 트로트 가수들의 꺾는 목과 콧소리, 가성의 꾸밈음과 고음으로 애절함을 고조시키던 창법-의 큰 강줄기에서 크지는 않지만 변화의 조짐을 보인 노래가 송민도의 데뷔곡 <고향초>였고, <나 하나의 사랑>, <청실 홍실> 이었다.
그녀의 색다른 담백한 중성톤에 가까운 ‘도시적 저음’의  음색에서 풍기는 지적 분위기는 크게 주목을 받고도 남았다.

 

          <고향초(故鄕草)>
1.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2. 장미꽃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날리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정든 사람 어데로 갔나
   전해 오던 흙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1948, 김다인(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 송민도의 앨범

송민도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감리회 개척교회 목사의 딸이었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잦은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출생지와는 거리가 먼 평안남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늦은 나이에 서울의 이화여고에 입학해 스물 네살에 졸업했다.

여고 졸업 후에는 잠시 만주에서 유치원 보모로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던 그녀가, 1947년 국내로 들어와 돌연 지금의 KBS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의 전속가수 1기 모집 공채에 응시, 합격해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더욱이 주변을 놀래키운 건, 그녀가 이미 결혼해 ‘애 딸린 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가수활동은 목사인 아버지와 이화학당 출신의 어머니(전 이화여대 총장이었던 김활란과 동창생으로 알려짐), 그리고 남편 등 온가족의 도움 속에서 당당하게(?) 꾸려나갔다.

그녀는 방송국 입사 3개월 만에 박시춘이 작곡한 <고향초>를 첫 취입해 세상에 내놓았다. 이때 ‘송민도’란 이름이 남자이름 같다 해 레코드사에서 임의로 ‘송민숙’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민도’란 이름은, 목사인 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하늘 민(旻)’, ‘길 도(道)’는 즉 ‘하늘 길, 하늘에 이르는 길’이란 뜻으로 나름으로는 남다른 종교적 의미가 있어, 이후엔 예명 사용을 하지 않았다.

아무튼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판에 박힌 쥐어짜는 ‘눈물 전주곡’ 같은 전통 트로트 가수의 음색과는 전혀 다른, 해서 그닥 촌스럽지 않은 목소리와 담백한 창법에 여학생들과 인텔리층의 호응이 눈에 띄게 많았다.

<고향초>는 6.25 전란 통에는 대구 피란지에서 작곡자인 박시춘이 선배가수인 장세정에게 취입을 시켜 대중적 인기로서는 오히려 원곡가수인 송민도 노래의 인기를 훌쩍 뛰어넘기도 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홍민 등 여러 가수들이 다퉈 이 노래를 리메이크 해 불렀다.
사실 <고향초>는 작사가인 김다인, 즉 조명암이 6.25 때 월북하는 바람에 한동안 금지곡으로 묶여 있다가 1987년에서야 금지가 풀린 시대의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송민도를 주목하게 한 노래는 1954년에 내놓은 <나 하나의 사랑>이었다. 이 노래의 작곡가 손석우(孫夕友, 1920~2019)는 생전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얘기한 적 있다.
“<나 하나의 사랑>을 발표할 때 송민도의 나이가 서른을 갓 넘긴 무렵이었는데, 새파란 젊은이는 아니었으나 가창력이 좋고, 성악의 수련을 쌓아 유형적(틀에 박힌) 기성가수와는 타입이 다른 존재였다. 사실 노래 기획단계부터 노래부를 가수로 송민도를 염두에 뒀었다.”

 

        <나 하나의 사랑>
1.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2. 나 혼자만을 그대여 생각해 주
   나 혼자만을 그대여 사랑해 주
   나 혼자만을 그대는 믿어주고
   영원히 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해 주

                   (1954, 손석우 작사 ᆞ작곡)

 

▲ 귀국 당시 함께 한 가수 박재란·송민도·고 금사향

1972년 미국 LA로 이민 가 정착
<고향초>와 <나 하나의 사랑>, <청실 홍실>의 연이은 히트로 탄탄하게 인기가도를 달리면서 이후 <청춘목장>(1957), <하늘의 황금마차>(1957), <행복의 일요일>(1958), <카츄샤의 노래> (1960, 영화 ‘카츄샤’ 주제가), <서울의 지붕밑>(1961, 영화 ‘서울의 지붕밑’ 주제가), <아네모네 탄식>(1961), <여옥의 노래>(1966, 영화 ‘산유화’ 주제가) 등의 곡들을 내놓아 히트시켰는데, 1960년대에 제작된 영화들의 주제가는 거의가 그녀가 불러 히트시켰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에게 남다른 사업수완이 있었던지 1963년에는 가수와 밴드, 무용단 등 25명 규모의 악극단 <백만불 쇼단>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으나, 적자를 면치 못해 결국 접었다.
그후 1972년 미국으로 훌쩍 이민을 가 지금은 로스앤젤레스 오렌지 카운티에서 조용하게 만년을 보내고 있다.

4년 전인 2016년에는 KBS <가요무대> 1000회 특집에 특별초대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귀국, 무대에 올라 <고향초>와 <나 하나의 사랑>을 부르며 끝내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전해 오던 흙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다 어데로 갔나…’
인생의 황혼을 등에 진 백발 성성한 아흔 한살의 노인은 꿈을 꾸는 듯했다.

 

당시 KBS전속악단 지휘자로 있으면서 작사·작곡을 겸했던 손석우는,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서 1960년대 듣기 쉽고 따라부르기도 쉬운 이지리스닝(easy-listening)계열의 스탠더드 팝(Standard Pop)시대를 연 중심적 작곡가로 평가되고 있다. 대표적인 노래가 1961년에 미국 컨트리 음악풍으로 만든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였다.

그러한 노력은 ‘대한민국 최초의 드라마 주제가 1호’라고 불리는 <청실 홍실>로 이어진다.
1956년 10월7일부터 그 이듬해인 1957년 4월28일까지 7개월간 30회에 걸쳐 방송된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멜로드라마였던 <청실 홍실>의 주제가는 극작가 조남사가 노랫말을 쓰고 손석우가 작곡을 맡았다. 노래는 송민도와 ‘국내 1호 학사(경희대 전신 신흥대학교) 출신 가수’로 뒷날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 칠 때>를 히트시킨 안다성(1930~  )이 듀엣으로 불렀다.

 

         <청실 홍실>
1. 청실 홍실 엮어서 정성을 드려
   청실 홍실 무늬도 곱게
   죄 없는 마음 속에 나 만이 아는
   음~음~ 수를 놓았소

2. 인생살이 끝없는 나그네길에
   인생살이 끝없는 회오리 바람
   불어도 순정만은 목숨을 바쳐
   음~음~ 간직했다오

3.청실 홍실 수 놓고 샛별 우러러
   청실 홍실 수 놓고 인정을 모아
   다시는 가지 말자 굳세게 살자
   음~음~맹세한다오

 

이 주제가의 대히트로 라디오 연속방송극은 ‘주제가가 필수’라는 불문율 아닌 불문율이 생겨나는 계기가 마련된 것도,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