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7> 유주용의 <부모>

가장 많이 불리는 ‘소월 시’ 노래
해마다 5월이 되면,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 땅의 거의 모든 이들이 <어머니의 마음>이나 <어머님 은혜>라는 동요를 들었거나 부르며 자랐을 것이다. 마치 어버이날(1973년 제정. 그 이전까지는 1956년 제정된 ‘어머니 날’로 기렸다)의 국민주제가처럼. 국문학자 양주동(1903~1977)이 지은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가사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1939년에, 충남 서산출신의 동시작가 윤춘병이 지은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하나 있지~’의 노랫말로 시작되는 <어머님 은혜>는, 그보다 조금 뒤인 1948년에 세상에 나왔다. 특히 양주동은 어린 다섯살 때 아버지를, 열 두살 때 어머니마저 여의고, 늘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부모님을 그리고 애달아 하며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시를 썼다고 전한다.

우리 대중가요 중에는 부모형제나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노래가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부지기수로 많지만, 그중 세상에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잔잔하게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시는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는 노래가 바로 1968년에 발표된 유주용(劉胄鏞, 1939~ )의 <부모>다.
일제 때의 대표적인 우리나라 서정시인인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시<부모>에 <고향무정>(오기택)·<뜨거운 안녕>(쟈니 리)의 작곡가 서영은(1927~1989)이 곡을 붙였다.

          

▲ <부모>앨범 재킷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 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
묻지도 말아라,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 보리라.
                      
(원시는 ‘알아보랴?’로 돼 있다)

                           (1968, 김소월 시/ 서영은 작곡)

 

당시 이 노래가 주목을 받았던 건, 대부분의 대중가요, 특히 트로트가 애상적인 사랑ᆞ이별노래가 태반이었던 판에 스탠다드 팝으로 단련된 유주용이 묵직하고도 부드러운 음색으로 우리 모두의 ‘부모’를 화두로 던지며,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 고뇌에 대한 물음을 누구나의 어깨 위에 조용히 얹어 놓았던 것. 게다가 유주용이라는 가수의 이국적인 수려한 생김새에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쏠렸던 것도 한몫 했다.

유주용은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재성씨는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 인재 양성을 위한 해외유학 바람에 편승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독일여인과 결혼한 공학자다. 노래 <부모>에는 다문화가정 출신으로서 유주용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도 간접적으로나마 얹혀져 있었지 않았나 싶다.

유주용 역시 경기고·서울대 화학과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아버지와 같은 공학자의 길을 가는가 싶었지만, 서울대 재학 때 그 ‘끼’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교내 장기자랑에서 1등을 하면서 서울 퇴계로 콘티넨탈 호텔 뮤직살롱의 빅밴드였던 민들레 악단의 멤버(싱어)가 되고, 곧이어 한 살 위 누나인 모니카 유(유인경, 1938~ )와 함께 미8군 무대로 진출했다. ‘한국의 프랭크 시나트라’를 자처하며 미8군 무대에서 유주용은 주로 <키스 미 퀵(Kiss me quick)> 등의 서양 팝음악을 번안해 불렀다. 이곳에서 만난 최희준·위키리·박형준 등과 함께 노래동아리인 <포 클로버스(Four Clovers)>를 결성한 것도 이때(1963년) 였다.

▲ 미8군 무대에서 함께 활동하던 가수들. (뒷줄 왼쪽부터)최희준·한명숙·유주용,(앞줄 왼쪽부터)이금희·윤복희·현미·박재란.

네 사람 모두가 워낙에 개성들이 강해 그룹밴드를 만들지 못하고,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 노래동아리를 만들어 세상에 희망을 주자는 뜻에서 동아리 이름을 ‘클로버’로 작명한 것이다. 여기에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한명숙)의 작곡가 손석우와 김기웅이 가세해 “맑고 건강한 홈 가요 보급으로 우리 대중가요를 발전시켜 보자”며 뜻을 모았다. 아마도 유주용의 <부모>도 이런 소위 건전가요 확산 분위기 조성 취지에 발맞춰 곡이 만들어 지고, 부르게 된 게 아닌가 싶다.

▲ 노래동아리 ‘포 클로버스’공동앨범 <저녁 한때의 목장풍경>. (왼쪽부터 가수 박형준·유주용·위키리·최희준의 전성기 때 모습)

어쨌든, 이 노래 한 곡으로 유주용은 가요팬들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된 건 분명하다.
가뜩이나 <포 클로버스>는 노래동아리 라고는 하지만, 소위 명문고·대학출신-최희준(경복고·서울대 법대)·박형준(외국어대 서반아어과)·위키리(경기고·서라벌예술대 연극영화과)·유주용(경기고·서울대 화학과)- 의 고학력자들 이라는 것도 대중가요 판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된 동기도 됐다.

극도의 빈곤에 찌든 소월의 생애
유주용의 <부모> 앨범에는, 유주용이 부른 또다른 노래로 김소월의 시 <님과 벗>(서영은 작곡)이 함께 수록돼 있다.

 

       <님과 벗>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향기(香氣)로운 때를
고초(苦草)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1969, 김소월 시/ 서영은 작곡/ 유주용 노래)

 

▲ 시인 김소월 시비(서울 성동구 왕십리 소재)

이 싯구절에서 보듯이 김소월은 대단한 술꾼이었다. 우리가 그동안 그의 서정시들에서 느껴왔던 가녀리고 다분히 여성적이기까지 한 ‘흰 달(그의 호 ‘소월’)’ 분위기와는 사뭇 딴판 이었다.
아마도 오히려 그 내성적인 성격이 그를 지독한 모주꾼으로 만들었지 않았나 싶다. 그 바탕에는 어려서부터 그의 처절한 아픈 가족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시작(詩作) 전성기 시절, 그의 시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시어는 ‘집’과 ‘돈’이다. 평북 곽산의 외가에서 자란 소월은, 그의 나이 겨우 두 살 때 아버지가 일본인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정신이상으로 평생을 실어증으로 말없이 산송장처럼 지내다가 굶어죽은 사실에 대한 지독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오산학교와 배재고보에 다니기 전인 14살 때 할아버지 친구분 손녀와 결혼해 조혼가정을 꾸려 4남2녀의 자식을 낳고, 일본 도쿄상대 유학을 경제사정으로 중도에서 포기하고 돌아와 낙향했으니, 먹고 사는 게 그리 간단치는 않았을 것이다.
혼자 신문지국(동아일보로 나중 폐간으로 지국도 문 닫게 됨)을 운영하기도 하면서 무슨 한 맺힌 사람처럼 오로지 돈만을 좇았다. 그는 평소에 늘 식구들의 입을 책임진 집안 가장으로서 돈 못벌어오는 자신을 굉장히 우울해 하며 그 정신적 고통을 술로 달랬던 것이다.

▲ 시인 김소월 시비(서울 성동구 왕십리 소재)

소월의 주벽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소설가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이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금 그는 말할 수 없는 술 주정꾼이 되어 붓을 잡을 생각도 안하며, 붓을 잡는다 하여도 그때의 그 힘이 그냥 남아 있을지가 문제라는 것이 어떤 그의 친지의  말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가난으로 응어리져 피폐하고 찌든 그의 가슴에서 어떻게 그런 서정적인 시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불가사의 이기도 하다.
그는 세상 뜨기 이틀 전 아내에게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것 같구려”하며 멋쩍게 쓴웃음을 지어 보이곤 이내 우울해 했다. 그러다 결국 소월은 자신을 바로 곧추세우지 못하고 1934년 크리스마스 전날, 곽산시장에서 그 자신이 사온 아편을 먹고 이내 잠들어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떴다. 그의 나이 한창 펼 32살이었다.

지금까지 소월의 시를 노랫말로 차용한 대중가요는 대략 59편. 최초의 노래는 1958년의 <진달래꽃>(손석우 작곡/ 박재란 노래)이며, 가수들이 가장 많이 즐겨부른 노래는, 1위-<부모>(유주용), 2위-<엄마야 누나야>(동요), 3위-<못잊어>(장은숙), 4위-<개여울>(정미조) 등의 순이다.그 외에 <산유화>(송민도)·<옛 이야기>(최희준)·<먼후일>(서유석)·<실버들>(희자매)·<초혼>(이은하)·<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라스트 포인트) 등이 잘 알려진 노래들이다.

▲ 장안의 화제가 됐던 유주용·윤복희의 결혼식 사진.

유주용은 한창 가수활동에 물이 오르던 1968년 가수 윤복희와 결혼해 장안의 화제가 됐었으나, 결혼 5년만인 1973년 이혼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재혼하고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길지 않은 짧은 생애동안 극도의 빈곤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술로 마음의 허기를 달랬던 소월의 마음이나, 다문화 가정의 혼혈아로서 젊었을 시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한때의 고민을 삭이고 따뜻한 가슴으로 부드럽게 <부모>를 노래한 ‘80노객’ 유주용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아마도 이런 마음은 아니었을까…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시 <엄마야 누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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