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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의 애달픔 삭이는 절절한 ‘국민 애창곡’

기사승인 2020.05.22  11: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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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6>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대한민국 제1호 가수’라는 별칭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도 / 징용 피해 /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 상해에서 / 천진에서 / 바다 건너 / 고국을 그리워 했다 // 샹송과 깐쪼네를 불렀다 / 위엄 있다 / 매혹 있다 // 해방 뒤 멋쟁이로 돌아왔다 / < 신라의 달밤 >을 불렀다 /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 건달같이 < 베사메무초>를 불렀다 // …(중략)… // 음절 파괴 대단했다 /육중하고 / 기름진 /바이브레이션 / 3음절이 7음절이 되어 /사람들의 심금을 휘감았다 / ‘고요한’은 ‘고호호요호하한’이 되었다 건달 황홀!」
-고 은, 시 《만인보》·20 중 <현인>     

   
 

가수 현인(玄仁, 1919~2002)에게는 ‘대한민국 제 1호 가수’라는 별칭이 따라 다닌다. 1945년 8.15 해방 후 앨범을 발표하면서 데뷔한 가수는 현인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독특한 창법과 훤칠한 외모도 대중적 인기몰이에 한 몫을 톡톡히 했다. 일본 도쿄 우에노(上野)음악학교에서 성악(바리톤)을 공부하고 성악가를 꿈꾸던 그였으니, 묵직하면서도 클래시컬한 노래의 톤이며 음색, 그만의 독특한 스타카토(Staccato, 음을 하나하나 끊어가면서 노래하는 창법)식의 창법은, 청승 맞게 눈물 찍어내게 하며 슬픔과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던 일제시대 때의 틀에 박힌 트로트들과는 사뭇 격이 다른 서구적 정서를 느끼게 했다. 게다가 반지르르하게 기름 바른 머리를 올백으로 반듯하게 빗어넘긴 모습이 영락없이 1942년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에서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과 연기한 미국의 전설적인 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를 닮았다 해 ‘한국의 험프리 보가트’로 불린 개성있는 훤칠한 외모도 대중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 부산 영도대교 입구에 있는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와 현인 동상.

훗날 현인이 인기가수가 되고 난 다음에 작사가 유호는 “코가 크고 서양사람이 되다 만 듯한 얼굴에 그만의 독특한 창법으로 인기가 많았다”고 우스개처럼 얘기한 적이 있다.
그는 또 생전에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1947년 현인의 첫 데뷔곡인 <신라의 달밤>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현인과 술을 잔뜩 먹고 밤12시 통행금지에 걸려 순사가 ‘누구요?’ 하고 물을 때마다, ‘신라의 달밤이오’ 하고 대답하면 ‘수고하십니다!’하고 무조건 무사통과 시켜줬다”는 우스개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신라의 달밤>이 처음 일반 대중에게 선보인 것은, 1947년 해방 후 최초의 영화인 <자유만세>를 서울 명동의 시공관(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봉할 때였다. 이때 현인의 나이 창창한 스물 여덟살이었다. 그의 노래 중 누구나가 현인 대표곡의 하나로 꼽는 <비 내리는 고모령>의 노랫말을 짓게 된 숨겨진 에피소드도 유호 작사가 본인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서울중앙방송국(지금의 KBS) 편성과에 입사해 근무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 <신라의 달밤>으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작곡가 박시춘으로부터 다급한 노랫말 부탁을 받았다.

   
▲ 옛 고모역 역사. 1925년 문을 연 경부선 철도역으로 지금은 폐역이 돼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방송국 도서관으로 갔다. 그때 무심코 도서관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우리나라 전도를 찬찬히 훑어보게 됐는데, 동대구역 옆에 자그마한 글씨로 돼 있는 ‘고모역(顧母驛)’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필시 ‘고모’라는 한자에 무슨 담긴 뜻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즉시 자리로 돌아와 그 뜻을 찾아보니, ‘고모역’의 ‘고(顧)’자는 ‘돌아볼 고’였고, 거기에 ‘어미 모(母)’가 붙어 있으니 ‘어머니를(가) 돌아본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고모령이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개이며, 일제 강점기 때 징병·징용에 끌려 나가는 아들자식과 어머니가 눈물로 이별하던 고개였다는 등등의 구구절절 얽힌 내력을 확인한 다음, 이내 펜을 들어 가사를 써내려 갔다는 것이다.

 

   
▲ 대구 수성구 만촌동 고모령 고개에 세워져 있는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비 내리는 고모령>

1.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2. 맨드라미 피고지고 몇해 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3.  눈물어린 인생고개 몇고개 이더냐
   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서린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1949, 호동아(유호) 작사 / 박시춘 작곡)

 

가느다란 기타선율에 얹혀 흐르는 가슴시린 말들·어머니·부엉새·산마루턱·맨드라미·물방앗간·망향초·망향의 노래… 노래를 불러도 그렇고, 들어도 먹먹해지면서 아득히 가슴 저며오는 눈물어린 사모곡(思母曲)이다.
작곡가 박시춘이 직접 설립한 럭키레코드사에서 1947년 찍어낸 <신라의 달밤>의 대히트 이후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그리고 외국노래 번안곡인 <베사메무초>(1949)와 <꿈속의 사랑>(1956, 1930-40년대 중국 여가수 공추가 부른 ‘몽중인(夢中人)’이 원곡) 등의 노래들까지 나오기가 무섭게 연속으로 히트하면서 현인은 단숨에 스타덤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대중가요계에 탱고·맘보·샹송·칸초네 등의 서양음악 접목까지 일대 신선한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나아가 그 바람은, 현인이라는 가수와 <비 내리는 고모령>이 우리 국민들 다수의 가슴에 실향의 애달픔을 삭이는 절절한 애창곡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절대적인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1985년 11월부터 지난 35년간 매주 월요일에 방영해 온 KBS <가요무대>가 집계한 ‘최다 엽서신청곡’ 순위에서 1위 <꿈에 본 내고향>(1943, 한정무 노래), 2위 <찔레꽃>(1943, 백난아 노래)에 이어 3위는 줄곧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이 차지한 것이 그것을 입증해 보이는 단적인 예다.

성악가에서 트로트 가수로…
현인의 본명은 현동주(玄東柱)로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이 고향이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유복한 집안 형편 덕에 경성 제2고등중학교(현 경복고)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애초 고교시절 배구선수를 하면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할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뜻대로 성사시키지 못하고 도쿄에 있는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입학해 성악(바리톤)을 전공했다.

그러나, “딴따라를 할 참이면 나와 인연 끊자!”며 대경실색한 고향의 아버지가 보내주던 학비를 끊자, 막노동을 하며 생활비를 벌면서 NHK(엔 에이치 케이)합창단원이 돼 활동하다가 결국 귀국하게 된다. 국내에 들어와서는 당시 성보악극단의 음악교사로 있으면서 1943년에는 중국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때 그를 대중가요 가수의 길로 적극 권유한 사람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이었다. 처음엔 “클래식 성악을 전공한 내가 트로트 가수라니… 당치도 않을 소리!”하며 펄쩍 뛰던 현인이 결국 끈질기고도 집요한 박시춘에게 설득 당해 첫 곡을 받은 것이 바로 <신라의 달밤>이었던 것이다.
그의 노래들은 세상에 내놓는 족족 순풍에 돛 단듯이 연이어 히트에 히트를 거듭했다. <꿈이여 다시 한번>(1948), <럭키서울>(1949), <서울야곡>(1950), <인도의 향불>(1950), <전우야 잘 자라>(1950), <굳세어라 금순아>(1953)… 등 현인은 1950년대에 이 땅에서 ‘가장 빛나는 대중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하게 됐다.

   
▲ ‘현대 한국인물(가수)시리즈’ 기념우표 인물로 선정돼 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2019년)

이와같이 우리 사회의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우정사업본부에 의해 ‘광복 이후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노래하며 그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로 선정돼 가수 백설희와 함께 ‘현대 한국인물(가수)’시리즈 기념우표(액면가 380원)가 발행되기도 했다.

1969년에는 임권택 감독에 의해 같은 이름의 멜로영화가 만들어 지기도 했으며, 2018년 어버이날 특별 효(孝)공연으로 <악극-비 내리는 고모령>이 만들어져 지방 순회공연을 하기도 해 현인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에 대한 서사적 가치도 크게 고양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현인은 56세 되던 해인 1974년 국내에서의 모든 생활을 접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가서 레스토랑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7년 만인 1981년 다시 영구 귀국해 간간이 방송출연 등의 가수활동을 하다가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2002년 4월13일 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떴다.

경주에 <신라의 달밤>노래비가, 그리고 그의 고향인 부산 영도엔 <굳세어라 금순아>노래비와 동상이, 대구 수성구 고모령 고개엔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세워져 있어 사후도 그닥 외롭진 않아 보인다.

그가 이 세상의 손을 놓고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올해로 20년이 다 돼가지만, 그가 서른 살에 부른 망향의 노래 < 비 내리는 고모령> 가락은 오늘도 비 내리는 고모령 고개를 타고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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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희 기자 history8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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