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무성한 방아잎을
볼 때마다 어릴적
장어탕이 그립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해 뒤척이다 일찍 눈이 뜨여 커튼을 젖히니, 창밖에는 어슴푸레 새벽이 일어나고 있다. 창문을 조금 열고 얼굴을 내밀어 살갗에 닿아오는 오소소한 한기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새벽의 찬 기운과 첫인사를 나누는 것이 싫지 않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아침을 바라보며 서둘러 배밭으로 내려가며 하루를 연다.

가을장마에 이은 태풍 ‘링링’의 거친 바람이 다 익은 배를 30% 이상 떨어뜨렸다. 유난히 이른 추석으로 조생종 ‘원황’배만 따서 추석 전에 선물로 보냈고, 대부분은 아직 빛깔이 들지 않아 달려있던 무거워진 배들은 태풍에 추풍낙엽이 됐다. 배가 많이 떨어지고 나니 가지에 남은 배들은 봉지가 찢어지도록 크게 살이 오른다. 떨어진 배를 정리하느라 올해는 추석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달은 얼마나 밝았는지, 형제들에게 명절문안도 잊은 채 며칠을 보냈다.

9월이/ 지구 북반구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대추는/ 대추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너는/ 내 가슴속에 들어와 익는다./  9월이/ 지구 북반구 위를/ 머물다 가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 대추는/ 대추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 너는/ 내 가슴속을 떠나야 한다.
시인 나태주는 9월이 다 가기 전에 익으면 떠나보낼 일을 노래했는데, 우리도 9월이 가기 전에 배나무에서 익은 남은 배들을 따야하고 갈무리해서 저장고로 떠나보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하다 보니 12시를 넘겨 땀이 밴 몸을 씻고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남편은 피곤한 몸을 소파에 묻고 어느새 잠이 들고 나는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린다.
창밖 멀리 치렁치렁 쏟아지는 금빛 햇살이 가을 들판에 드러눕는다. 앞마당에는 제 마음대로 번져서 자란 꿀풀과의 방아(배초향)가 보라색 긴 줄기 꽃을 피우고, 오래 전에 몇 포기 얻어 심었던 것이 마당 가장자리, 길가, 집둘레를 여기저기 무성하게 점령한 채 집 안팎을 방아향으로 채우고 있다. 햇살을 받아 블루 사파이어처럼 찬란한 보랏빛 꽃줄기에 사랑을 구걸하듯 벌, 나비가 몰려들어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느라 온 마당이 소란스럽다. 창으로 불어오는 방아 향기에 나는 불현듯 아버지가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다. 아버지는 바다낚시를 자주 갔었다. 돌아올 때마다 바구니엔 장어가 가득 넘쳤다. 큰 솥에 장어를 푹 삶아 소쿠리에 건져 으깨고, 뽀얀 국물에 파, 마늘, 고춧가루, 시래기 등을 넣은 후 된장으로 간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방아잎을 한 주먹 넣고 한소끔 끓여 동네 사람들과 평상에 둘러 앉아 장어국을 먹었었다.
아버지는 종종 나를 데리고 바다낚시를 갔다. 범일동 자성대가 있는 부산부두는 집에서 멀지 않았다. 부두 앞 바다에는 커다란 통나무가 바다를 메웠고 뗏목처럼 엮어 놓은 나무 위에서 일렁이는 파도를 느끼며 아버지의 낚시를 따라했었다.

유난히 장어만 많이 잡혔다. 아버지를 따라 돌아오던 큰 길에는 엄청나게 큰 제재소가 있었고, 둥근 전기톱날이 ‘윙윙’ 거리며 통나무를 켜는 것이 담장 사이로 보였었다. 낚시 하다 저녁 늦게 돌아오면 엄마는 “위험하게 애를 데리고 낚시를 가지 말아요.”라고 아버지한테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는 게 재미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제대 후 실업자였고 엄마가 가족을 먹여 살리던 때였으리라.

그때 그렇게 질리도록 먹었던 장어국이 오늘은 너무 그립다. 여긴 충청도 산간이라 그렇게 싱싱한 장어도 없고 다시 부산을 간다 해도 과연 그때의 장어국을 먹을 수 있을까? 무성한 방아잎을 볼 때마다 내일은 추어탕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 하지만 결코 그 그리움의 갈증은 풀어지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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