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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로 되찾은 건강, 널리 공유하고파”

기사승인 2019.02.15  10: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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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회 농촌 스토리 공모 대상 수상작 - 경남 의령 장은하씨의‘산초 전도사’

   
▲ 산초비누 만들기 체험교실에서 참가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장은하씨(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본지는 농촌지역에 전승돼 오거나 회자되고 있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발굴·수집해 농촌문화 콘텐츠 자원을 확보해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소재를 제공하는 농촌 스토리 공모를 실시하고 있다. 이번 호부터 제3회 농촌 스토리 공모 수상작들을 게재한다. 이번 호에는 대상을 수상한 경남 의령군 장은하씨의 글을 싣는다.

 라오스 성공 뒤로 하고 의령서 제2인생 시작
 건강도 소득도 인정도 나누는 산초전도사 되고파

   
 

“의병의 고장 의령을
 산초 고장으로 만드는데 앞장”

새벽 6시, 우리 부부는 오늘도 어김없이 산에 오른다. 일요일이지만 빼먹지 않고 직장에 출근하듯이 집에서 3km쯤 떨어진 산초농원으로 포터트럭을 몬다. 1만5천여 평에 심은 3천여 그루의 산초나무들이 밤새 별일이 없는지, 마치 부모님 안부 묻듯이 농원 전체를 돌아보고 일일이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다.
산초나무는 아름답다. 6월 하얗게 꽃으로 단장한 자태도 우아하고 화려하지만,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그리고 수확하면 흑진주 색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열매는 또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남편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산초 군락을 마주할 때는 마누라보다 좋고, 손주들보다 더 사랑스럽다고 표현한다.     

   
▲ 산초짱아찌

나는 주변에서 ‘산초 전도사’로 불린다. 산초는 이래이래서 몸에 좋다고, 산초기름의 효능을 전파하고 다닌다. 산초열매나 잎 등 부산물을 가공식품으로 만들어 또 다른 소득도 올릴 수 있어, 입만 열면 산초자랑을 하다 보니 붙은 별명이다.
산초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향신료로 약용 및 기름으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 산초기름을 구매하시는 고객들에게 물어보면 기관지 천식, 폐 질환 관련, 아토피나 대상포진, 위장 관련, 면역력 강화에 효과가 있다며 많이 찾는다. 또 식용과 약용으로 산초 열매를 구매하는 분들은 눈의 피로 개선이나 시력 증진, 독소 배출, 면역력 강화 등을 꼽는다.

내가 사는 곳은 경남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의령은 인구 3만 명이 안되는 경남에서 가장 작은 자치단체다. 천하절경도 없고 특별히 내세울 유명한 특산품도 없고, 그저 소박하게 농사짓고 촌로들이 많이 사는 전형적인 시골이다.  
우리가 이곳, 시어머니 혼자 계시는 시집으로 돌아온 것은 지금부터 7년 전인 2011년이었다. 귀농귀촌이 아니라 귀국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나는 동남아에 있는 라오스에서 15년간 살았다. 1998년, 중매로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곧바로 라오스로 갔다. 남편은 우직하고 저돌적인 성격이지만, 의외로 꼼꼼한 면이 많아 일을 잘 벌이고 잘 진행시키면서 또 많은 성과를 거두는 편이었다.

그이는 1993년 무역회사에 취직해 라오스 지사에 근무하다, 평생을 월급쟁이만 할 수 없다며 2년 만에 퇴사한 후 직접 무역회사를 창업해 한약재를 수출하면서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7년에는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 13ha 규모의 농원을 매입한 데 이어 가방의 원료를 공급하는 피혁회사를 설립했고, 1999년에는 골프장을 경영하기 위해 부지 128ha를 인수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여행사와 미디어회사를 창업하는 등 계열사를 계속 늘려 나갔다.

조용한 성격인 나는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내조만 했다. 남편이 필요로 하는 부분만 돕고 거들었지 타고난 성격상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남편이 이렇게 승승장구한 것은 미지의 땅 라오스에 한국인으론 1세대로 진출한 데다 혁신적인 사고와 남다른 경영능력 덕분이었지만, 그보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두루 경험하면서 길러진 오기와 인내가 그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또 현지 회사에 다니면서 라오스 국립대 라오스어반을 졸업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가장 중요한 언어문제를 해결하면서 사업에 자신감이 붙었던 것이다. 남편은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1996년 한인회를 설립해 감사와 회장, 고문을 역임했고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라오스 정부의 표창을 여러차례 받았으며, 정부 고위관료와도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당시는 한국과 라오스와의 관계가 활발하지 못한 때여서 우리 정부 요인이나 외교사절 방문 시 남편이 민간외교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때문에 ‘글로벌 한국인’, ‘오지를 가다’, ‘메콩 프로젝트’ 등의 주제로 국내 TV와 신문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적도 있다.
사업 확장과 성공 외에는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던 우리 부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8년 전. 우리 부부는 전염 되듯이 둘 다, 어느 날부터 의욕이 상실되고 삶이 무기력해지면서 향수병이 도드라졌다. 남편은 감정 조절 불안에다 성공과 돈에 대한 허무감이 온몸을 휘감으면서 대인기피 등 종합적인 우울증 증세가 덮쳤다.

나는 더 심했다. 물도 땅도, 사람도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라오스에서 오로지 성공을 위해 억지로 버텼던 15년은, 내 몸과 마음 곳곳에 병마를 침투시켰다. 나는 소위 말하는 종합병원이었다. 40대에 갑상선 암과 복막염 수술을 받은 후에 염증이 많아졌고 당뇨에다 척추관 협착증까지,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고향생각이 간절해졌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월조도 남쪽가지만 골라 앉아서 운다는데 갈수 있는 고향을 두고 이렇게 타국에서 병고에 무너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을 거듭하게 됐다. 2011년, 마침 고향의 시어머니(81)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게 됐다.

그때부터 1년 정도 귀국을 준비하면서 의령에서 2~3개월씩 장기 체류를 시작해 어르신들을 모시고 시장과 병원 다니기를 소일거리 삼아 점차 고국생활에 적응해갔다. 남편은 동네 어른들 권유로 4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이장을 맡게 됐다. 이장을 하다 보니 특이한 경력 때문에 지방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20년 전 미지의 나라 라오스에 진출해 여러 분야의 사업에 손을 대 부를 일구고, 그 나라의 대통령과 장관 등 고위공직자와 연을 맺어 우리나라 민간외교에도 새 지평을 연 의령군 화정면 상정1구 이장 심형욱씨. 부와 명예를 양손에 쥐었으나 홀연히 5년 전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마을 이장으로 변신한 그는 현재 만 2년째 이장을 맡아 마을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고.
우리가 고향에 정착해 첫 번째 시도한 것은 표고버섯 원목재배 작목반 구성이었다. 회원 20여 명을 모집해 서로 의논하고 연구를 거듭하며 재배면적을 확대해 나갔다.

다음은 도시민의 귀농귀촌 지원에 앞장섰다. 의령군농업기술센터의 협조로 ‘귀농인의 집’을 지원받아 빈집 3곳을 수리하여 젊은 층을 전입시키고, 부산의 대형 병원과 연결해 마을주민 전체가 의료봉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부산광역시에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개설하는 소득도 거두었다.
그러다 우연히 산초기름의 효능에 필이 꽂혔다. 아마 몸 이곳저곳이 아픈데다 별 차도도 없던 차여서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듯이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염증제거에 좋다는 산초기름을 장복해보니 몸이 점차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일시 귀국해있던 2013년, 남편을 졸라 산초나무를 심어보자고 나섰다. 명분은 산초기름의 효능과 시장성이었다.

남편은 나를 위해 중고 굴삭기를 매입하고, 독학으로 배운 기술로 그동안 묵혀놓았던 집 근처의 잡초만 무성했던 땅을 신수가 훤하게 바꿔놓았다. 우리는 의령군농업기술센터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고 묘목을 선정해 400여 그루를 심었다. 산초나무는 정말 종류가 많았다. 같은 날, 같은 묘목으로 심었는데도 열리는 시기와 방식, 수세, 수확량 등이 다 달랐다.
산초를 첫 수확하는 철이 다가왔다. 정성을 다한 덕분인지 나무들이 참 잘 자랐고 열매는 잘 영글어갔다. 지금부터는 새하고 싸움이라는데 내심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산초열매를 새들이 워낙 잘 먹어서 새가 먼저 먹든지 아님 내가 먼저 따든지 싸움인 것 같았다. 남편도 걱정이 많이 됐던지 “내가 새들 대표를 만나서 얼마씩 나눠먹을지 합의 한번 해 볼까?”라며 농담도 던졌다.

산초는 정말 생물이다. 빨갛게 익은 열매를 따서 말리면 새까만 알갱이가 톡 튀어 나온다. 이걸 모아서 기름을 짜는 것이다. 처음에는 까만 알갱이가 나무에 달린 채 튀어 나오길 기다렸으나 새들이 귀신같이 익은 열매만 골라먹고 줄기만 남겨놓았다. 첫해의 작은 성공을 계기로, 다음 해에는 식재면적을 3~4배쯤 더 늘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새들로부터 열매를 어떻게 지켜낼지가 관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수확을 하고 기름을 짜서 판매에 나섰다. 다음으로 닥친 문제는 판매였다. 남편과 힘을 합쳐 땀 흘려 일하는 것은 자신이 있었는데 영업은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먼저 그동안 운영해온 블로그에 사진과 함께 글을 올리고 판매에 나섰다. 소주병 크기 한 병에 13만 원을 받기로 했다. 그동안 흘린 땀의 양과 비례하면 내심 100만 원을 받아도 비싸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지만, 무릇 값이라는 것은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던가. 어쨌든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처음으로 우리 이름을 걸고 만든 상품을 다 팔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를 기약하며 준비에 들어갔다. 

산초농가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초묘목에 있다. 산초나무의 종류가 워낙 많다보니 잘못 심었을 경우 재배 농가의 속 쓰림은 정말 심하다. 어떤 농가에서는 몇 년을 정성들여 가꾸었는데도 막상 수확철이 되면 열매는 없고 나무와 꽃만 무성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묘목을 제대로 선택하는 것이 문제인데 나무가 어릴 때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결국, 3~4년씩 고생하며 가꾼 것을 헛일이라고 판단되면 나무를 베어내는 방법 외에는 없다. 어떤 집은 몇 백 그루, 몇 천 그루까지 애지중지 자식처럼 가꾸었던 산초를 베어낸다고 하니 그 속앓이가 오죽할까. 묘목을 잘 선택했다 하더라도 산초 열매 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무가 이유 없이 죽는 일도 많고 병해충도 장난이 아니다. 폭염에도 약하고 잦은 비에도 약해서 정말 예민한 생물이다. 열매가 익어 가면 또 새하고 전면전을 치러야 한다. 

산초농사 3년째에 접어드니 겨우 뭘 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아는 만큼 후회도 그림자처럼 뒤따라온다. 왜 내가 하필 산초농사를 시작했을까? 묵묵히 땅을 파고, 잡초와 끝없는 전쟁을 치르고, 나무를 매일 자식처럼 돌보는 남편을 옆에서 보노라면 미안한 마음이 엄습해 온다.
그래도 산초기름 때문에 건강이 좋아졌기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고질병인 척추관 협착증 때문에 막 귀국했을 때는 걸음걸이가 정말 불편했었는데 산초기름 덕분에 이제는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호전됐다. 위장 장애도 개선돼 식성이 좋아져 활력이 넘치게 됐고, 건강검진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갑상선 암도 완치됐다.    

산초를 시작한 후 처음에는 제법 재미를 보았는데 2018년 산초농사는 폭염 때문에 반타작에 그쳤다. 산초나무가 더위와 가뭄을 못 이겨 열매가 부실한 것이 상당수였다. 꽃은 늦게 피었고 덜 익은 열매는 타들어갔다. 어린 열매는 말라서 다 떨어지고 나뭇가지도 시들시들해졌다.
나무나 사람이나 모름지기 뿌리가 튼튼해야 된다는 말은 틀림이 없다. 산초농사를 짓다 보니 모질고 미묘한 인생을 다시 배우게 된다. 무릇 세상에 쉬운 게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열매가 맺히는 시점에 가뭄과 뜨거운 날씨로 꽃이 타고, 열매가 맺히더라도 씨알이 커지지 않아 대부분 쭉정이만 남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쭉정이는 보기에는 좋아도 기름이 나지 않아 수확할 필요가 없다. 아직 수확하지 못한 좋은 열매는 새가 다 따먹는다. 그래서 가슴에는 허망함만 남고, 눈앞에는 빈 줄기나 쭉정이만 가득하다.

그나마 우리 농원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우리가 가입하여 같이 활동하고 있는 의령군  산초연구회 회원농가들은 모두 정성껏 키워 믿을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자고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대부분 실망과 허탈감만 남았다. 그 무더웠던 한여름, 높은 산으로 물을 싣고 나르며 흘린 땀으로 나무를 적실만큼 모든 것을 바친 재배농가들을 보면 가슴이 아린다. 그래도 수확은 해야 하고 가공도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기에 다시 힘을 내 작업을 해야 했다. 며칠 동안 계속 비가 오면 온 집안이 산초 향기로 진동을 한다. 산초향이 이리도 좋았던가. 정작 땀 흘리고 일할 때는 맡지 못했던 산초향이 이제야 코끝에 그윽하다.

농부들이 자식 입에 먹을 거 들어가는 거 하고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거 보면 배부르다는 소리를 하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이해를 할만하다. 하얀 껍질을 선풍기로 한 번 더 거르고 소쿠리와 망, 채 등 온갖 도구를 다 동원해 씨앗을 분리하는 방법을 찾아 고심을 거듭한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일단 지금까지 한 방법 중에 그나마 괜찮은 방법을 찾아냈다. 산초열매를 가지 채 꺾어와 잎을 따내고 그늘에서 이틀, 햇볕에 하루 말리면 바짝 마르면서 씨앗이 튀어나온다. 이걸 방망이로 두드리면서 큰가지를 손으로 걸러내고 구멍이 큰 소쿠리로 잔가지까지 골라낸다. 그리고 손으로 한 번 더 비비고 구멍크기가 8호인 채로 치고 알루미늄으로 된 낮은 채반으로 치면 겨우 알갱이만 나오는 것이다. 이걸 다시 한 번 더 말려서 선풍기로 먼지나 껍질을 걸러내야 하는데 다섯 번이나 이 같은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기름을 짤 씨앗을 볼 수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걸 좀 더 쉽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수능시험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짜리보다 더 공부하고 연구하느라 우리 부부는 진이 빠졌다. 이렇게 힘겹게 씨앗을 모아서 산초연구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가공공장에서 같은 날 기름을 짜게 되는 것이다. 산초기름 짜는 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예전에는 찌거나 볶는 방식으로 했지만 요즘은 산초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열매를 생 압착하여 바로 착유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먼저 산초열매를 잘 껍질을 벗겨서 정선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깨끗하게 살균해서 또 한 번의 건조과정을 거쳐야만 착유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먹기도 편하고 향과 맛이 은은하다.

기계에서 흘러내리는 산초기름을 보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기름 한 방울 한 방울이 나무를 심고 수확하기까지 그동안 흘렸던 우리 부부의 땀방울 같다. 완성된 산초기름은 열매가 튼실한 정도나 건조 상태, 껍질이 섞인 정도에 따라 맛이 다르다. 껍질이 많이 섞이면 산초 냄새가 많이 나고, 덜 마르면 찌꺼기가 많은데다 맛도 안 좋으며 검은색을 많이 띠게 된다.
가뭄과 폭염으로 수확량은 적지만 그래도 남은 열매를 잘 건조시켜 정성을 다해 상품으로 만들어 고객들에게 보내니 많은 분들이 산초기름이 참 좋다고 칭찬을 해줘서 힘을 얻고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다른 농사도 그렇겠지만 특히 산초농사는 하늘이 좌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산초나무가 워낙 예민해서 날씨 때문에 나무가 죽거나 병충해로 고사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힘만 들고 수익이 별로여서 점차 포기하는 농가가 늘어났다. 2017년이 되자, 산초연구회 회원이 당초 32농가에서 고정 멤버로 겨우 15농가만 남았다.

남은 우리들은 그래도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가공시설 현대화, 산초 시범지구 선정, 산초 명품화 사업, 영농법인 설립, 산초기름 병 개선, 가뭄 대책, 가지치기 방법 등등 모두가 그동안 경험으로 얻은 노하우를 공유하며 새로운 미래를 모색했다.
또 귀농인들로 구성된 산초재배 작목반도 만들었다. 5가족 10명이 새로운 식구가 됐다. 의령군농업기술센터로부터 산초재배 지원사업을 따내, 회원들과 공동작업과 일정들에 대해 머리를 모았다. 이제는 대단위 재배로 품질관리도 함께하여 산초재배와 산초기름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남몰래 가져본다.

그리고 우리 산초연구회에서는 그동안 준비해왔던 브랜드명을 ‘산애산초 산초기름’으로 확정했다. 또 산초관련 9개 품목에 대해 브랜드 등록을 완료하였고 의령군이 역점시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항노화 사업의 일환으로 산초기름 재배와 판매를 포함시켜 공동 가공공장을 설립하고 포장과 가격을 통일하니 품질과 모양새도 더욱 세련돼졌다. 
산초 새순이 돋아나는 어느 날 저녁을 준비하다, 갑자기 산초나무의 새순을 나물로 만들어 먹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새순을 살짝 데쳐 하나는 소금으로 간을 하고 다른 하나는 초장에 버무려서 어떤 맛이 나는지 만들어 보았더니 쓴맛도 없고 뒷맛이 은은한 게 상당히 괜찮았다. 남편도 먹어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초장에 찍어 먹는 게 더 맛있다고 한 표를 던졌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버리지 않고 데치고 말려서 건 나물로 건사하여 틈틈이 만들어 먹었다.

내친김에 우리는 산초나무의 부산물로 수익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에 들어갔다. 사실 산초기름은 수확량이 많지 않은데다 가격이 워낙 비싸다보니 노력하는 만큼의 만족도를 얻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른 회원들과도 머리를 맞대다보니 산초 장아찌나 산초효소, 깻묵, 껍질 차, 담금주, 새순까지 산초기름 외에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산초 장아찌를 완성했다. 먹을 때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느낌과 고기를 먹을 때, 또 입맛을 돋우는 용으로 최상이다. 또 산초비누도 만들어냈다. 산초비누는 가려움증이나 지루성피부, 땀띠 풀독 등에 좋아 찾는 사람이 많다.  

연구를 거듭하다 보니 산초 열매를 활용하는 방법이 상당히 많았다. 나름 산초에 대해 제법 전문가 급이라고 자부했는데 산초 열매 주문하시는 고객들로부터도 많은걸 배운다. 산초열매 장아찌로 인연이 된 어느 노부부는 가정상비약으로 산초열매 발효액을 만들어 보라고 귀띔을 해주셨다. 근데 산초기름 가격이 워낙 비싸니 원가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 같아서 이를 해결하는 것이 숙제로 남는다.
내가 사는 이곳 의령은 작은 고장이지만 주민들의 자존심과 개성이 강하다. 흔히 의령을 의병의 고장, 충의의 고장으로 부른다. 400여 년 전인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유린했던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전국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던 고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병은 의령의 정신이자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꿈은 이 같은 정신을 토대로 한, 모두가 행복하고 함께 어울려 잘사는 고장을 만드는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단초는 바로 산초에 있다. 오늘의 건강한 나를 있게 만들었고 나름 행복하고 만족하며 살 수 있도록 해준 산초기름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건강도 나누고, 소득도 나누고, 인정도 나누는 명실 공히 산초 전도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초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흡하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식재부터 판매전략 노하우까지 많은 사람들과 아낌없이 공유하고 싶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의령하면, 바로 연상되는 의병과 곽재우 장군에서 앞으로는 의령산초를 떠올리게 하고 의령 산초기름을 찾도록 하고 싶다. 남편과 나는 의령산초가 전국 최고의 명품이 되는 날까지, 주저앉지 않고 우리 산초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지금처럼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갈 것이다.  

 

■ 현장인터뷰

   
▲ 건강을 되찾기 위해 의령에 정착한 장은하씨는 산초를 키우며 시어머니, 남편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만족해 했다. 산초의 매력에 푹 빠진 장은하씨는 심지어 갓 태어난 강아지 이름도 ‘산초’라고 붙였다.(사진 왼쪽부터 장은하씨, 시어머니, 남편 심형욱씨)

“시련은 있어도 포기는 없어요”

부부의 열정과 뚝심으로 만든 지금의 행복
산초로 돈보다 건강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 더 커

   
▲ 산초는 가루는 물론 기름, 비누, 장아찌 등 쓰임새가 다양한 매력적인 품종이다.

산초기름 1병으로 건강 되찾아
수려한 글솜씨에 비해 인터뷰 내내 수줍어 굳은 얼굴을 숨기지 못하던 장은하씨. 100년 된 집을 여기저기 고쳐가며 살고 있지만 산초를 통해 본인은 물론이고 시어머니까지 건강을 되찾아 물질적으로 풍족했던 라오스보다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빈 손으로 시작한 라오스에서의 성공을 뒤로 하고 의령으로 오기까지 왜 고민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남편은 사업일로 바빠 얼굴보기도 쉽지 않았고, 남편 위주의 생활패턴으로 향수병도 심했었죠. 근데 여기서는 농사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같이 붙어 있어야 하잖아요. 물론 장단점은 있지만요. 가장 중요한 건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건강한 의령에서 사는 것에 만족한다는 거죠.”

지금 누리는 행복의 밑바탕에는 산초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염증으로 고생이 심했었는데 다른 약은 도통 듣지를 않았지만 주변에 어떤 이가 준 산초기름 1병을 먹었더니 염증이 금세 가라앉았다고 한다. 지금은 병원에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할 정도로 건강해졌다. 하지만 산초를 키우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더위와  비에 예민해 참 손도 많이 가고, 향이 좋아 새들이 수시로 쪼아대서 몸이 고달픈 건 사실이지만 본인이 효능을 직접 체감했기에 기꺼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산초껍질은 가루를 내는데 따뜻한 성질로 몸의 염증을 줄여줘 한약방에서 많이 쓰이곤 했다. 열매는 생으로 압착을 해서 기름을 내는데 장은하씨처럼 효과를 본 이들의 주문이 쇄도하면서 만드는 족족 나가 가족들 먹을 분량을 빼놓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향이 좋은 산초의 특성을 살려 비누로도 가공해 판매하는 수완을 발휘해 소득도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 남편과 헤쳐가
시행착오도 무수히 겪었다는 장은하씨와 남편 심형욱씨. 산초나무 묘목을 구하러 경남 하동, 전북 진안, 경북 김천의 농장을 찾아다녔지만 어쩔 수 없는 초보시절이라 보는 안목이 없어 가짜를 사기도 했고, 심어놓기만 하면 저절로 큰다는 사기 아닌 사기에 속은 적도 많았다.
허나 장은하씨는 시련은 있을지언정 포기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으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갔다. 여기에는 라오스에서처럼 뚝심 있게 일을 추진하는 남편의 역할도 큰 몫을 했다고.

“라오스에서는 남편 뒷바라지만 했는데 산초농사를 지으면서 제 재능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요. 산초를 가공해 비누를 만드는 것이나 블로그에 산초로 만든 장아찌로 할 수 있는 요리법을 올리자는 것도 제 아이디어였죠. 예로부터 산초를 달인 물은 모든 요리에 활용해도 좋다고 동의보감에 소개됐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한 시도였죠.”

남편의 사업수완은 의령에서도 여전했다. 의령군 산초 재배농가와 함께 만든 의령군 산초연구회는 ‘산애산초’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지난해 가공공장을 확장했을 정도로 성장세가 대단하다. 공장에는 착유기, 건조기, 선별기가 구비돼 있고, 모든 과정을 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다 공개할 수 있을 정도이다 보니 이 브랜드는 의령을 넘어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고 있다고 장은하씨는 자랑스러워했다.

“산초로 돈을 벌어 좋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저처럼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커요. 그래서 몸이 힘들어도 응당 해야 할 수고라 생각하며 남편과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해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사는 게 최고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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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동 기자 lhdss@naver.com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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