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47)

자광도, 북흑조, 다마금, 대골도, 황되오리, 자채, 사노리, 소되소리, 다다기, 구렁잠, 에우디, 두이라…
이 별스런 이름들이 우리의 옛 토종 벼(쌀) 품종 이름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성 싶다. <금양잡록>이란 옛 문헌에는 1480년대 이전에 이 땅에서 심어 먹었던 벼 품종이름 27종이 기록돼 전한다.

겉모양, 밥맛에 따라 붙여진 품종 이름도 기차다. 보리 따라 익는다 하여 보리따라기, 일찍 익는다고 닭우리, 해빙 머리에 씨 뿌린다고 얼음걷이, 쌀알 크기가 작다 해서 앙증다리다. 젖내가 돌면서 감칠맛이 난다 하여 배탈벼, 밥이 연하고 달다 하여 조개벼다. 뿐이랴. 껍질이 얇고 쌀 등에 금이 나 있다 하여 등금벼, 벼이삭 나오는 것이 늦어 잎줄기 속에서 움츠리고 있다고 해서 목움츨이, 성숙할 무렵 껍질의 등이 터진다 하여 등터지기, 조선조말 고종 때 조 씨 성을 가진 독농가가 개발했다 하여 조동 지로 불리는 벼가 있다.

특히 조동지벼는 볏 잎이 보랏빛을 띠어 자채(紫彩)벼라 했는데, 여주·이천에서 나는 고품질의 경기미 조상격인 쌀이다. 자채는 음력 유월유두(6월15일)때 일찍 수확해 나랏님에게 진상하고 추석 명절 차례상에 올렸다. 이 벼는 다른 지역에서는 재배, 생산되지 않아 자채벼 만을 재배할 수 있는 논을 ‘진상 따라기’라 부르기도 했다.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은 대략 3000년 전쯤 된다. 일제시대 때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과거 우리나라의 벼 품종 수는 무려 1451종에 달했다. 지금은 1200종 가량이 브랜드화 돼 있다. 고시히까리, 삼광, 신동진, 고품, 호품, 하이아미, 추청, 오대, 칠보 등이 그중 대표적으로 재배·유통되고 있는 쌀 품종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주식이었던 쌀이 이제는 그 주식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다. 지난 해 우리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61.8Kg으로 1985년의 128.1Kg의 절반이하 수준으로 떨어졌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만큼 쌀을 덜 먹었다는 얘기다. 거기에는 전통 가족체제의 붕괴와 그에 따른 1인 독거가구의 증가, 그리고 건강을 앞세운 서구화 된 국민 식생활 패턴의 변화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아울러 토종 쌀 특유의 기능적 맛을 장려하기보다는 다수확 품종 단일화로 몰고 가면서 오직 생산량 증대에만 골몰했던 1970년대 개발시대 이래의 획일적인 쌀 정책도 생산 농민은 물론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옛 어른들은 “밥이 보약이여~”, “늙으면 밥심으로 사능겨~”라고 했다. 대학시절 시골로 농활을 가면 “한 알의 쌀알에도 농민의 피와 땀과 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는 ‘식훈(食訓)’이란 걸 식사 때마다 경 외듯 큰 소리로 따라하던 기억도 새롭다.
그러나 이젠 그 ‘밥심’이 ‘빵심’에, ‘풀(채소)심’에 제 자리를 내어주고 저만치 물러나 앉았다. 그리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자꾸만 자꾸만 저만치 멀어져 간다. 아, 밥심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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