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45)

조용필 50주년 투어콘서트 ‘땡스 투 유(Thanks to you!)’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지난 5월12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은 온통 팬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서울 강남역 인근 한 빌딩 외벽에 걸린 가로 10m, 세로 13m 크기의 조용필 50주년 축하 광고 현수막에는 지금도 80년대 10~20대적 열정이 식지 않은 ‘오빠부대’ 팬들의 열망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조용필! 음악은 그의 삶이었고, 그의 음악은 우리의 삶이었다. 당신의 열정을 응원합니다.’

오로지 음악 말고는 TV의 동물프로그램을 보는 것 외에 특별한 다른 취미 없이 심심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그가 노래한 건 정확히 46년 됐고, 1950년생이니 우리나이로 치면 예순아홉살 이다. 칠십 ‘고희(古稀)’가 코앞이다. 옛날 같으면 안방 아랫목 구들장 차지하고 앉아 손주들 재롱이나 보며 풀기 없이 살 나이다.

오직 노래만을 위해, 그 노래에 환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는 그는, 열여덟 어린 나이부터 기타메고 무대에 서 온 지난 50년이 단 한 순간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고 했다. 매번 다른 산에 오르는 고행이라고도 했다. 처음부터 다시 기어 올라가야  하는….
그는 2013년 <바운스>로 다시 돌아왔을 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그만두면 지금까지 저를 좋아한 분들이 어떤 실망을 할까… 하는 사람들 생각이 가장 두렵다…그러나 허락되는 날까지 해야 한다”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1950년 3월21일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리에서 3남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화성 송산국교(1962), 경동중(1965), 경동고(1968)를 졸업했다. 1969년부터 미8군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 1975년 솔로 전향 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1979년 1집 앨범의 타이틀곡인 <창밖의 여자>가 대한민국 최초로 100만장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 단일음반이 되면서 락·발라드·트로트 등 거의 모든 음악 장르를 소화시키는 1980년대 최고의 히트가수가 됐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Q> <그 겨울의 찻집> 등의 곡을 작곡해 그와 작업을 했던 작곡가 김희갑 씨는 조용필을 일러 “제일은 가창력이다. 톡 쏘는 창법에 가사를 잘근잘근 씹어 부르니 감칠맛이 난다.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져 그의 빈틈없는 공연은 거기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는 가수로서의 삶에서는 ‘살아있는 가요계 역사’ ‘전설’ ‘가왕(歌王)’ ‘국민가수’ 등 최고의 헌사를 누리면서도 개인적으로 두 번의 짧게 끝난 결혼생활 만은 불행했다. 그는 2003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두 번째 부인 고 안진현 씨와 결혼하면서 “그녀의 순종적이고 가정적인 태도 때문에 결혼 결심을 굳혔다”면서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 노래하고, 이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 꿈”이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노래 외에 그가 꾸었던 꿈 하나는 사라졌다.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꿈은 무엇일까… 그리고 왜  우리 모두는 그리워 하는 걸까?
80년대 그 시절을, 그리고 조용필의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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