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서울대학교 공대 이동녕 명예교수

22권 저술, 특허개발 10건
국내외 학술지 논문 334편 등
세계적인 석학

산학협동 롤모델 보여줘

서울대학교 공대 이동녕 명예교수는 박사 55명, 석사 85명을 배출시키고 그 중 30명을 교수로 진출시킨 유능한 교수다. 
이 교수는 옥외 전화선과 전선으로 쓰이는 전기전도율이 높은 동복강선(銅覆鋼線)을 개발해 한국의 산업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 세계 공학도 사이에서 많이 인용되는 국제 학술논문 402편을 발표한 세계적인 석학(碩學)이다. 
이 같은 그의 큰 업적은 ‘자원이 빈곤한 가난한 나라를 기술강국으로 일으켜야 된다’는 불굴의 의지와 애국심으로 개척해낸 것이다. 
한국 발전을 견인해온 이 시대의 진정한 과학자인 이동녕 박사의 삶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귀감이다. 이 박사의 귀중한 삶에 관한 얘기를 들어본다.

가정교사로 가족 생계비 보태며 서울공대 대학원 졸업
이 박사는 경남 함안 산골에서 태어났다. 주민 대다수가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할 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지식인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군청 행정계장으로 나라일 외엔 다른 일을 해선 안 된다는 올곧은 마음으로 땅을 갖지 않고 오직 월급으로만 8남매를 키우셨다. 외가는 함안군내 부자로 가까운 친척들 대다수가 일본으로  유학가 중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교육 명문 가정이었다. 

이 박사는 집안이 가난한 탓에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으나 어머니의 교육열로 진주중학교을 졸업하고 서울 공대를 갈 수 있었다. 그는 서울대 진학 후 효성그룹 장학금을 받았다. 또 실력부족으로 경기중 입학이 어려웠던 지도교수 아들의 가정교사를  하며 그를 경기중학교에 진학시키면서 인기 가정교사가 돼 생활비를 벌며 대학생활을 마쳤다.
그는 자신이 과학자가 된 것은 가정이 가난하고 나라가 가난해 이를 구해보고 싶은 열정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전 집이 가난한데다 8남매의 장남으로 동생을 돌봐야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잘 할 수 있는 건 오직 공부였고, 취업이 빠른 공대를 진학해야 된다는 집념으로 공학도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공대 졸업 후 취업해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길 바라셨으나 후일을 기약하며 가정교사를 계속하며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면서 서울공대 대학원을 마쳤습니다. ”

대학 동기 종용으로 미국 유학 결심
장학금 일부 고향에 보내며 박사학위 취득

대학원 졸업 즈음 이 박사는 미국 유학중이던 공대 동기생으로부터 나라 발전과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는 미국 대학원 진학을 해야된다는 간곡한 편지를 받았다. 이 박사는 가난한 집안 사정 등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미국에 유학가도 생활비는 계속 보내겠다고 약속하며 입학을 서둘렀다. 당시 돈이 없던 이 박사는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에 입학원서와 관련 서류를 보냈다. 우편료를 아끼려고 성적표와 영어로 써 뒀던 서울 공대 대학원 석사 논문도 함께 보냈다. 

그중 워싱턴 주립대학교로부터 월 300달러 장학금을 준다는 연락이 왔다. 300달러를 받아 40달러는 등록금으로, 남은 260달러 중 30달러는 매월 집에 보낸다는 약속을 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30달러는 공무원 월급과 맞먹는 돈이었다. 미국 항공료가 없어 유학을 종용한 친구에게 350불을 빌려 318불로 비행기표를 끊고 남은 32달러만 갖고 1966년 8월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 

이 박사는 장학금을 아껴 집에 생활비로 보내야 했기에 오직 공부에만 전념했다. 유학온지 15개월만에 워싱턴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석사학위를 받은 후 지도교수를 따라 미국 남부의 하버드로 불리는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원에서 재료공학 박사과정을 등록한다. 밴더빌트 대학원에서 지도교수였던 베리 딕레터 교수는 이 박사에게 박사 전 논문으로‘화학과 물리학에 기반한 액화물질 개발’관련 학술논문집 집필 제의했다. 731쪽의 책에 이 박사의 논문 상당 부분이 게재됐다. 베리 딕레터 교수는 이 박사의 논문을 극찬하며 주저자(主著者)로 내세우는 영광을 얻었다.
이 박사는 미국 유학 4년3개월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안정적 생활 접고 인재양성·기술개발 위해 귀국
이 무렵 서울공대 선배였던 최형섭 박사가 이끄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발족을 앞두고 이 박사의 귀국을 독려했다. 베리 딕레터 교수는 연구환경이 열악한 한국보다 영국 캠브릿지대 캐번디시 연구소의 노벨상 수상자인 모트 교수에게 지도받기를 강력히 권유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영국 유학보다 귀국 후 인재양성과 과학기술개발 연구가 급하다며 은사의 영국 유학 권유를 단호하게 물리쳤다. 주위 사람들도 미국에서 공학박사 학위와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새로운 생활을 누리길 권유했지만 ‘잘사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소명 하나로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자마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귀국을 서둘렀다.

KIST재직 중 ‘동복강선’ 산학협동
이동녕 박사가 KIST 재직 중 서울대 금속공학과 2년 후배인 (주)일진의 허진규 사장을 소개받는다. KIST와 (주)일진 공동으로 구리의 우수한 전기 전도도(傳導度)와 강(鋼)의 강도를 융합한 옥외전화선과 전선으로 쓰는 동복강선(銅覆鋼線) 개발 성과를 이뤄낸다. 이 박사 주도하에 KIST 3000만 원 출연과 일진그룹 3000만 원의 연구 자금을 받아 영국 등 선진국이 갖고 있던 동복강선을 개발해 낸 것이다. 이후 전자제품 소재가 되는 동박(銅薄)강선 개발에도 힘을 보탰다. 일진그룹은 동복강선 국산화를 계기로 직원 6000명이 근무하는 중견 대기업으로 급성장한다.

서울공대 교수로 전직
기업 연구 용역 제자와 공유…생계비·학비 지원

1974년 10월 이 박사는 서울공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서울공대 교수 월급은 KIST의 절반 수준이었다. 사택도 없고 연구비 또한 열악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인재양성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다는 큰 뜻을 갖고 과감히 서울대 교수로 전직했다. 

그는 서울대 재직 중 각 기업이 의뢰한 연구과제를 집중적으로 수주받아 연구과제를 학생들과 함께 한다. 연구자금의 회계를 학생에게 위임해 학생들의 생활비와 학자금 마련을 위한 월급 형태로 지급했다. 그 결과 박사 55명과 석사 85명을 배출하고 그 중 30명은 대학교수로, 그외 포스코와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에 입사시켰다. 그는 정년 은퇴할때까지 저서 22권과 국내학술지 논문 110편, 국제학술지 논문 224편, 발명특허 10건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해 재료공학 기술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최근 그가 펴낸‘나는 행복한 과학자’라는 책을 읽어보면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밤낮없이 연구와 개발에 매진한 공학자로서의 평생을 바친 그의 열정적인 인생 여정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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