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작 - 윤옥주 씨의 ‘황홀한 요단강’

본지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실시했던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작 중 이번 호에는 윤옥주 씨의 ‘황홀한 요단강’을 싣는다.
또한 현장 심층취재를 통해 미처 글로 표현하지 못한 숨은 뒷얘기와 감동을 전하고자 한다.
이번 작품을 끝으로 당선작과 우수작 게재를 마무리 한다. [편집자 주]

“황홀한 요단강 너머  황금을 꿈꾸지만
 모두 인간이 만든 망상의 강이 아닐까”

▲ 윤옥주 여사가 김재수 장관과 함께 찍은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소녀 시절 잠깐 사귀었던 친구 하나가 있었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보름달처럼 넓적 둥글한 복스러운 얼굴을 생각하니 그립다.
한 살 아래인 친구는 친언니처럼 나를 잘 따랐고 마음이 참 좋아서 나를 예쁜 언니라고 불렀다. 어느 일요일 친구는 교회에 간다며 꼭 한번만 따라가 달라고 했다.

친구는 교회에 가서 기도시간에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단강을 건너가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단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동행해 처음으로 교회에 갔다.
예배가 끝나 친구는 자기 집으로 가자며 나를 끌었다. 친구는 작은 정제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방안에는 작은 책상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큰 엄마가 첩년의 딸이라며 엄마와 같이 부엌일을 하라고 해서 식모가 됐다며 자기 처지를 하소연했다.

친구는 몹시 슬픈 표정으로 책상 서랍 속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집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작은 증명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앳된 사내아이였다. 누구냐고 했더니 일꾼살이 했던 머슴 아들이란다. 언젠가 친구 집에 머슴 살던 일꾼아들인데 세 살 더 많은 오빠란다. 그 머슴애는 가끔 아버지가 일하는 집으로 와서 허드렛일도 해주고 친구가 힘든 일을 하면 거들어 주었는데 아버지가 일꾼살이 그만두고 어딘가로 떠나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왜 하필 알 수 없는 사람을 생각하느냐 물었더니 그 남자 아이만 생각하면 보고 싶고, 짠하고, 도와주지 못한 마음에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땐 가난살이가 뭔지도 몰랐었는데 힘드냐고 손이라도 잡아줬더라면 떠나지 않았을 거라며 슬퍼하던 친구의 모습이 엊그제 같이 눈에 선한데 벌써 반 세기가 흘렀다. 난 아직도 친구가 말한 요단강이 어디에 있는지, 그 강 너머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삼십 년 전, 친정아버지께 은혜를 입고도 갚지 못했다. 아버지가 병이 나시던 그 전날 나를 부르셨다. 아버지는 삽살문이 달려있지 않는 오두막집에 살고 계셨다.
집으로 찾아가니 아버지는 호미 하나를 들고 나오더니 집 뒤란으로 가셨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가 호미로 땅을 파니 작은 옹기 그릇 하나가 나왔다. 깨진 그릇 속에는 종이돈과 동전이 담겨있었다. 무슨 돈이냐고 아버지께 물으니 우리 큰 딸 결혼사진 찍어줄라고 엿장사에게 고물을 팔아서 모아 두었는데 주고 싶어서 불렀다며 애비가 부모 노릇을 하지 못해서 너에게 빚을 진 것만 같아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고 하셨다. 그래서였는지 난 지금도 아버지 말만 나오면 눈물이 나온다.

추석 때, 아버지는 엄마와 동생들에게 만일 당신이 죽거든 부조 돈이 들어오면 한 푼도 쓰지 말고 큰 딸에게 줘야 한다고 했다. 상여가 없어도, 거적때기 초상을 치른다 해도, 죽었으니 알 수도 없고 서운해 하지도 않을 테니 큰 딸 손에 쥐어주라 하시고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초라한 상여가 문밖을 나가던 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아버지가 눕혀진 널짝을 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떠날 줄 몰랐던 그 옛날 아픈 기억들이 지금 생각해도 한숨으로 되돌아온다.

엄마와 동생들은 아버지 유언을 따라 부조 돈을 나에게 주었고 그 돈으로 300평쯤 되는 밭을 살 수 있었다. 처음으로 우리 땅을 갖던 날 나는 아버지 산소가 있는 쪽을 향해 하늘이 뚫어져라 악을 썼다.
“아버지, 나 땅 샀단께. 밭을 샀단 말이제. 아버지 보인당까.”를 주절대며 울었다.

봄이 되어 무엇을 심을까 했는데 엄마 말씀이 아버지 살아생전에 땅이 있다면 인삼이나 더덕을 심고 싶어 하셨다고 알려주셨다. 인삼을 알아보니 수월한 돈벌이가 안돼 결국 더덕을 심기로 했다.
주인이 더덕을 심은 땅을 밟으면 작물이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하여 땅이 닳도록 밟은 지 3년이 되어 가을에 처음으로 수확을 하던 날, 우리 부부가 3년 동안 부자의 꿈으로 키워왔던 더덕 뿌리를 뽑던 그 순간은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웠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왜 그렇게 많이 했던지 더덕 담을 박스가 없어서 가게에 가서 과자 상자를 사와 그 안에 담고 털끝 하나라도 다칠까 싶어 내 젖무덤처럼 소중하게 포장해 우체국에 가서 서울 가락동 안에 있는 상회로 우송을 했다. 그러자 기가 막힌 가격표와 돈이 송금돼 돌아왔다. 두 번째 물건을 보냈는데 여전히 어이없는 가격에 더덕을 팔 수가 없어 심란한 마음에 전북 정읍에 살고 계시는 외가댁을 찾았다. 외가댁에서 신문 조각의 활자들 속에서 내가 본 것은 ‘농산물을 제 가격에 받지 못하면 민원을 보내라’는 문구였다.

난 억울하게 싼 가격으로 후려치기한 얼굴도 모르는 장사꾼을 혼내주고 싶었고, 농사지은 우리를 무시한 만큼 응징해 주고 싶어 사연을 올렸다.
옛날 백성의 원성을 듣고 심판해 주는 신문고처럼 긴 설명을 보냈다. 며칠 후 더덕을 보내라는 전화가 왔고 속는 셈 치고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더덕의 가격은 가락시장보다 열두배 정도의 금액으로 돌아왔고 한 통의 전화와 서신도 함께 왔다.

농림축산식품부 국장이란 명함과 열심히 힘을 내 잘 살아가라는 편지였다. 얼굴도 모르는 그 분은 농사는 잘 경작했는지, 태풍과 물 걱정, 가족들 안부를 묻기도 하고 격려를 해 주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아이가 패싸움으로 난감할 때도 해결을 해주셨고, 내가 수필을 써서 운 좋게도 상을 탈 때마다 잘 하셨다고 안부전화와 소식을 주실 때면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싶은 분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분과의 인연이 닿질 않았다. 내가 몇 년을 연락드리지 않았던 탓이다.

우연히 외삼촌 제사에 갔던 날 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라 몇 번이 걸려와도 받지 않았다. 다시 걸려온 남편의 전화에서 아까 어떤 전화가 오지 않았냐고 그분이 반가운 전화를 해준다 했다.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는 아무개씨를 아느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더니 농촌진흥청 청장님이라고. 장흥에 오셔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준다며 전화를 끊고 외삼촌 제사를 모신 뒤, 잠을 자려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외가댁에서 쉬고 싶었지만 그분이 궁금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전화를 걸어주신 분은 장흥군농업기술센터에서 근무하는 제해신 씨란 젊은 청년이었다. 제해신 씨의 이야기인 즉슨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에 군수님과 업무를 보러 가셨는데 장흥에서 오신 직원을 보시고 내 안부를 묻길래 모르는 사람이라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윤옥주를 알게 되었고 김재수 장관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해신 씨와 군수님은 중간 역할을 크게 해 주신 분들이다. 그 해 여름 장흥 정남진 물축제를 맞춰서 장흥에 오신다고 그 분의 가족이 가르쳐 주셨다. 어느 날 나를 군청으로 오라며 제해신 씨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장흥군청 앞에는 많은 군청 직원들과 공무원들이 나와 계셨고 길다란 플랜카드가 높이 걸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분이 오신다는 환영의 표시였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초조한 시간동안 내 마음에선 별별 상상이 영화화되었다. 어떻게 생기셨는지, 어떤 용모인지, 나를 본체만체 지나가시며 고개만 끄덕이는 인사만 하실지, 공상이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그때 대형버스가 들어오고 공무수행 진흥청 글씨가 쓰여 있는 버스 문이 열렸다. 맨 먼저 내리는 청년 뒤에 몇 개의 카메라 플래쉬가 불빛을 터트리고 명찰을 목에 두른 신사 분들이 뒤를 따르고 군수님 앞에선 청년과의 악수와 인사가 모두 끝이 났다. 그리고 누군가를 찾았다. 군수님은 나에게 인사를 시켜 주시며 뒤로 물러서는데 그 신사가 내 손을 잡으시며 놓을 줄 모르셨다. 조금 전까지 상상 속 영화로 보았던 그 손님이 나를 보시려고 물축제에 오셨단다.

높으신 양반이 양복에 넥타이가 아니고 아주 깨끗하고 파란 점퍼 차림이셨다. 장흥 물축제에 맞는 의상을 입고 오셨단다. 그 분과 나는 두 손을 꼭 잡고 녹원식당으로 자리를 잡았고 사진 기자들은 우리에게 계속 셔터를 눌러서 나는 당황했다. 어떤 박사라고 명찰을 달고 계시는 분이 웃음소리를 내도 괜찮냐며 나를 쳐다보신다. 그러라고 했더니 윤옥주 선생님이 젊은 분이라고 생각했단다. 왜냐고 물었더니 회식 자리에서도, 차 안에서 오는 내내 윤 선생님 얘기만 하셨다고.
그리고 청장님은 우리가 알게 된 지가 몇 년이냐고 물으셨다. 모른다고 했더니 벌써 17년이 됐다며 지난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는 무슨 선물을 준비할까 고민했는데 내가 지은 콩과 내가 담근 반찬을 드리기로 했다.
편지와 전화로 자주 소식을 주고받았고 그로부터 3년 뒤 지도소의 제해신씨가 연락을 했다. 그 분이 나를 보러 오신다고 장흥읍으로 나오라고 했지만 나는 못 간다고 했다. 그럼 장동산장에서 점심을 먹는 것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 분이 농림부 차관으로 계시다가 유통공사 사장으로 근무하면서 식품회사를 돌아보기 위해 장동에 있는 새롬이란 헛개나무 회사에 오신단다.

4월11일 우리 부부는 장동산장으로 내려갔고 조금 있으니 여러 대의 승용차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셨던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했고 그분이 도착하셨다.
나와 제해신씨는 또 한 번 재회의 반가움으로 손잡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에 김성 장흥군수와 군청 직원들, 농업기술센터와 광주농산물 직원들까지 도란도란 음식을 먹는데 이 요리가 무슨 요리냐고 사장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군에서 인정받는 장흥명가 약오리라고 말씀드렸더니 진짜 음식이 맛있어서 잘 먹었다는 칭찬도 해주셨다.

점심이 끝나고 우리는 헛개나무 회사인 새롬회사에 방문했다. 그곳에서 주신 좋은 선물과 사장님의 귀한 선물도 함께 정성으로 보듬어 집에 돌아왔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무지한 고생과 힘든 육체노동으로 고달프게 느낄 때도 있고, 인간으로 태어나 폼나는 멋진 인생도 꿈꾸지만 사는 거 별거 아니었다.

내가 살아본 삶에 묻어놓은 연륜에서 보니 돈 있고 모든 시스템이 여유롭게 이뤄진다면 좋겠지만 살다보면 그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남한테 욕 안 먹고 남의 것 탐내지 않고, 작은 배려와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되는 것을 무슨 허욕이 많아서 아등바등 그렇게들 살고 있는지….
황홀한 요단강 저 너머의 황금을 꿈꾸어 왔던 나는 그 강을 가보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인간이 지어 만든 망상의 강이 아닐까?
덧없는 옹졸한 욕심을 버리고 넉넉한 가슴으로 소중하게 맺어온 인연들. 내 가슴에 고이고이 간직하며 살련다.

 

▲ 윤옥주 여사가 김재수 장관을 만나게 해준 제해신 소장과 손을 마주잡고 있다.

■현장 인터뷰

“소중한 인연, 넉넉한 가슴으로 간직하리…”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황홀’과 부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요단강’이 어떻게 같이 쓰일 수 있을까. 그 의미가 무척 궁금해진다. 죽음의 문턱과 가까운 요단강에서 황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황홀한 요단강’을 쓴 전남 장흥의 윤옥주 여사를 만나봤다.

농사의 쓴맛을 치유하다
윤옥주 여사가 인연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알게 된 사건은 50년도 더 된 어릴 적으로 돌아간다. 마을에서 윤옥주 여사와 함께 나고 자란 친구 김숙희 여사. 공모작에도 나왔듯 그는 굉장히 깨끗하고 선한 사람이었단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고, 또 믿고 행동하는 그 친구의 모습을 보고 나도 참 부러웠어. 나는 여전히 사람을 대할 때 경계심이 많거든.”
인연을 맺을 때만큼은 항상 조심한다는 윤옥주 여사. 그는 남한테 받는 조그마한 배려까지 무겁게 여기며 그대로 베풀어 감사함을 모두 갚는단다. 또한 남을 성가시게 하고 피해주지 말자는 신조를 항상 가슴에 새기고 다닌다고.

그런 그가 한 사람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현재까지 연락을 지속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윤옥주 여사는 990㎡(300평)가 넘는 밭을 구입해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더덕을 심은 뒤, 집 앞 정류소 근처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뽀빠이 과자 상자를 얻어와 제일 좋은 상품만 가득 눌러 담아 가락시장공판장으로 보냈다.

하지만 당시 중개인, 중매인 등 판로에 대해 잘 몰랐던 윤옥주 여사는 제일 좋은 상품만 가득 담아 보냈음에도 7000원밖에 손에 쥐지 못해 아쉬움과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죄송스런 마음이 온 몸을 뒤덮었다고 말했다.
윤옥주 여사는 농사의 쓴맛과 헛헛한 마음을 안은 채 가족이 있는 전북 정읍에 잠시 올라갔다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됐다. 이 소식이 그와 윤옥주 여사의 연결고리가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가족이 있는 정읍에 갔다가 삼촌이 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신문을 보여주더라고. 거기에 ‘가격을 후려치기 당하면 정부에 민원을 넣어라’라는 글이 있었어. 그래서 고민할 겨를도 없이 글을 써서 보냈지.”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7000원의 더덕이 몇 십 배가 넘는 금액이 돼 윤옥주 여사에게 돌아왔다. 이 지원금을 보낸 것이 바로 지금의 농림축산식품부 김재수 장관이다.

얼굴도 모르던 첫 만남
김재수 장관은 시골 촌구석에서 일하는 농촌여성의 민원조차 허투루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소식을 안타깝게 여기며 더덕 값을 제대로 치러준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글로써 김재수 장관의 좋은 일을 알릴 수가 있어 무척 행복해.”

그 후, 김재수 장관은 윤옥주 여사를 살뜰히 챙겼고 자신의 위치에서 어려운 농업인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보였단다. 더덕의 제값을 찾아준 것 외에도 윤옥주 여사는 김재수 장관으로부터 또 하나의 도움을 받았다.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 그걸 값으로 치면 더덕 값의 천배만배는 될 거야. 우리 딸내미 사고에도 발 벗고 나서줬으니까.”

딸 고등학생 시절, 친구와 싸움을 벌였는데 그 친구가 경찰서장 딸이라 사건해결이 힘들어 졌다.
“딸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가족들은 다 다른 지역에 있고 신원보증을 해줄 사람이 없는 거야. 그때 딱 김재수 장관이 생각나서 염치도 없이 전화를 걸었어.”
결국, 윤옥주 여사의 딸은 김 장관의 도움을 받고 무사히 고등학교 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재수 장관과 윤옥주 여사의 인연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민폐라 여기는 윤옥주 여사가 미안한 마음에 먼저 연락을 끊었기 때문이다.
당시 농림축산식품부 국장이었던 김재수 장관은 윤옥주 여사와 연락이 끊긴 채로 미국 연수를 떠났지만 윤 여사에게 틈틈이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때 받은 편지는 아쉽게도 사라졌지만 윤 여사는 그때 본 내용만큼은 여전히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단다.

“나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김재수 장관도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면서 힘든 걸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가라고, 힘내라고 응원해줬지. 편지 속에서도 그 분이 열심히 살고 바르게 산다는 게 느껴지더라고.”
놀라운 사실은 김재수 장관으로부터 편지를 받을 때까지도 윤옥주 여사는 김재수 장관의 얼굴, 그리고 그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한다.

농업인과 공무원, 그 애틋한 관계
전화와 편지로만 서로의 연락을 주고받던 김재수 장관과 윤옥주 여사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장흥군농업기술센터 제해신 소장 덕분이다. 당시 농업기술센터 계장으로 있던 제 소장은 이명흠 장흥군수와 농촌진흥청 행사에 참여했고, 행사장에 도착한 제해신 소장이 장흥에 왔다는 말에 김재수 장관은 윤옥주 여사의 안부를 물었단다.

이후 농업기술센터로 돌아온 제해신 소장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윤옥주 여사를 수소문했고 그때의 인연으로 현재까지 연락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김재수 장관이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으로 있을 때, 제 소장은 윤옥주 여사를 모시고 aT를 방문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단다.
“지난해 3월에 나주에 방문했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농사 이야기, 사는 이야기, 가족 이야기에 지루할 틈이 없었죠.”

게다가 김재수 장관은 자신이 도와준 윤옥주 여사의 딸까지 잊지 않고 언급해 윤옥주 여사의 마음을 더욱 뭉클하게 만들었단다.
“정말 너무 감사한 분이야. 농사로 힘든 마음을 잘 알고 치유해주는 게 진정한 지도자가 아닌가 싶어.”

자주는 아니지만 틈틈이 연락을 지속하고 있는 김재수 장관과 윤옥주 여사. 잠깐의 인연으로 끝날 뻔 했고, 서로 얼굴을 마주한 건 단 3번 밖에 없지만 꾸준히 연락하면서 30년이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김재수 장관은 농업인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속 시원히 긁어줬고, 윤옥주 여사는 이러한 지도자에게 반평생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이 둘의 만남처럼 서로를 이해하는 농업인과 공무원이 늘어나 행복하고 따뜻한 농촌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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